김준기 동부 회장과 동부그룹 본사 사옥 전경. 일요신문 DB
반도체 사업에 대한 김 회장의 애정과 정성, 신념은 재계에서 유명하다. 김 회장은 부품소재부터 완제품까지, 동부를 종합전자회사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여러 번 피력해왔다. 올해 초 유동성 문제가 제기되는 가운데서도 동부대우전자(옛 대우일렉트로닉스)를 최종 인수한 것도 이 꿈을 이루기 위한 것으로 해석됐다. 동부하이텍 매각을 결정한 후 김준기 회장은 “비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선구적 역할을 하며 이제야 비로소 본궤도에 올려놓았는데 매각하게 돼 안타깝다”는 심경을 밝혔다고 한다.
지난 1997년 동부전자로 출발한 동부하이텍은 지금까지 줄곧 동부그룹 유동성 위기의 원인으로 꼽혀왔다. 흑자를 내기는커녕 그룹의 자금이 계속 투입돼 왔으며 사업 포기 혹은 매각 대상으로 거론되기 일쑤였다. 동부그룹 내부에서도 반도체 사업에 대한 회의론과 반대 여론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김 회장은 반도체 사업의 꿈과 필요성을 꺾지 않았다.
반도체 사업에 대한 김 회장의 열의가 가장 대표적으로 표출된 것은 2009년. 당시 부채 규모가 1조 9000억 원에 달해 유동성 위기에 몰렸던 동부하이텍을 살리기 위해 김 회장은 사재 3500억 원을 투입, 동부하이텍의 재무구조를 개선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동부하이텍의 농업부문 매각, 유화 및 반도체부문의 부동산 매각 등 일련의 작업도 병행하며 동부하이텍의 부채를 상당 부분 해소했다. 당시 재계 일각에서는 “(농업부문 등) 알짜기업을 팔면서까지 반도체에 매달리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얘기도 적지 않았다.
이만큼 애착을 보였기에 김 회장이 동부하이텍을 내놓자 재계가 술렁이는 것은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1997년 설립 이래 한 번도 연 단위 흑자를 기록한 적이 없던 동부하이텍은 올 상반기 48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 설립 이래 처음으로 연간 흑자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던 상황이다. 비로소 동부의 반도체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는 시점이었던 것. 동부그룹 관계자는 “그룹 전체를 살리기 위해 20년여 붙잡고 있던 꿈을 놓은 것”이라면서 “동부하이텍 매각이 주는 상징성과 메시지는 상당하다”고 말했다.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과 한진해운 첫 대형 사선 유조선 라스 타누라호 항해 모습. 연합뉴스
실제로 연매출 6000억 원 정도를 기록하는 동부하이텍 매각이 연매출 25조 원에 달하는 동부그룹 재무구조 개선에 즉각적·실질적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때문에 재무구조 개선에 대한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 달라는 채권단 요구에 김 회장이 결단을 내린 것으로 해석된다. 애지중지하던 반도체 사업을 포기함으로써 재무구조개선 의지를 강력히 피력하겠다는 것이다.
향후 투자 리스크를 해소했다는 점에서도 동부하이텍 매각은 의미가 작지 않다. 반도체 사업은 꾸준한 투자가 요구되는 데다 투자 규모 역시 다른 사업과 비교하기 힘들 만큼 어마어마하다. 비록 당장은 큰 투자 없이 수익을 내기 시작한다지만 반도체 사업을 계속 영위하는 한 향후 막대한 투자비가 소요된다는 것은 불을 보듯 빤한 일이다.
재계 고위 인사는 “채권단 측은 동부가 반도체 사업을 계속 붙잡고 있는 한 막대한 규모의 투자비 때문에 재무구조 개선이 힘들 것으로 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동부그룹 관계자는 “채권단이 투자 리스크 해소 차원에서 동부하이텍 매각을 요구했던 게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비슷한 시기,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 역시 채권단에 “모두 내려놓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의 이 말은 경영권 포기 발언으로까지 해석된다.
극심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는 한진해운은 채권단과 함께 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악화한 재무구조 때문에 최 회장이 꿈꿔왔던 계열분리와 독립경영은 사실상 물 건너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더욱이 한진해운홀딩스 지분을 담보로 대한항공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기로 결정이 나면서 계열분리는 요원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 내려놓겠다”는 최 회장의 발언은 계열분리를 넘어 회사가 살 수 있다면 경영권까지 내놓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앞서 지난 10월에는 설윤석 전 대한전선 사장이 “회사를 살리고 주주의 이익과 종업원을 지키기 위해 과감하게 스스로 경영권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히며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난 바 있다. 재계 관계자는 “동양 사태 이후 오너들의 생각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현장에서 느낄 수 있다”며 “성장과 집착을 좇던 오너들이 안정을 추구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t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