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나이트클럽 무대에서 러시아 무희가 춤을 추 고 있다.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 ||
두 남녀는 1년 전 한 결혼정보업체의 소개로 만나 결혼한 사이였다. 그러나 막상 결혼하고보니 업체의 소개와 달리 남편의 조건은 여성의 기대에 턱없이 못미쳤다.
결국 잉가(24)라는 이름의 이 러시아 여성은 결혼 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물론 남편은 이를 만류했다. 남편은 부인의 여권도 숨겼다.
그러나 부인은 이날 남편 몰래 여권을 찾아내 공항으로 향했다. 미리 예약해둔 모스크바행 13시50분발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였다. 뒤늦게 부인이 떠난 사실을 안 남편은 비행기 출발시간을 1시간 앞두고 공항 대합실에서 그녀를 찾아냈다.
서울지검 형사7부(부장검사 박태석)는 최근 러시아 무용수들에게 예술흥행비자(E-6) 발급을 알선해 입국시킨 뒤 윤락을 강요하거나 가혹행위를 일삼은 공연기획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일부 러시아 무용수들이 러시아대사관에 제출한 진정서를 통해 그들의 인권침해 실태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고 있음이 드러났다.
이에 따라 한국 법무부는 지난 2월18일 러시아대사관과 협의를 거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러시아 무용수에 대한 예술흥행비자 발급을 당분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그렇다면 이런 조치가 러시아 여성에 대한 인권문제를 해결하기에 충분한 것일까. 러시아대사관 관계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직 요원하다는 뜻이다.
현재 러시아 여성이 한국으로 오려면 예술흥행비자(E-6)를 발급받거나, 결혼을 목적으로 하는 방문동거비자(F-1) 중 하나를 받아야 한다. 관광비자(C-3)도 있지만 심사기준이 엄격해 거의 발급되지 않는다는 게 러시아대사관의 설명.
한국 법무부의 이번 예술흥행비자 발급자격 강화조치로 무분별한 러시아 여성들의 국내 입국은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린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 이 비자를 발급받아 국내에 체류중인 러시아 여성은 3천∼5천 명에 달한다. 이들은 한국을 떠나면 재입국이 사실상 불가능해 체류기간 연장을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러시아대사관의 고민은 또 있다. 결혼을 목적으로 방문동거비자를 발급받아 입국한 러시아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도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 한국 법무부에 따르면 방문동거비자를 받아 국내에 체류중인 러시아인은 지난 2000년 1백46명, 2001년 2백55명, 2002년 3백17명 등으로 매년 급증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 여성과 한국 남성의 결혼은 대부분 중간에 국내 결혼정보업체가 개입돼 있다. 러시아 여성과 결혼을 원하는 한국 남성이 업체를 찾으면 업체측에서는 늘씬한 러시아 여성의 사진을 보여줘 ‘백인 여성’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다. 일단 여기서 업체에 설득당한 남성은 1천만원에 이르는 소개료를 업체에 지불해야 한다.
▲ 이혼상담을 위해 러시아대사관을 찾은 한 여성 이 <일요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 ||
업체의 선전에 의해 결혼에 대한 그릇된 환상을 갖는 것은 러시아 여성도 마찬가지. 업체측에서 ‘한국에 가면 귀부인처럼 살 수 있다’ ‘만약 살다 이혼하게 되면 무조건 남편 재산의 절반을 받을 수 있다’는 등 그릇된 정보를 주기 때문.
이렇게 이뤄진 결혼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임은 당연지사. 러시아대사관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 남성과 러시아 여성의 결혼생활이 1년 내에 끝나는 경우가 전체의 80%에 육박한다고 전한다.
인천공항 대합실에서 소동을 벌인 잉가 부부 역시 그런 케이스. 고진훈씨(가명·39)는 1년 전 결혼알선업체를 통해 러시아로 건너가 잉가를 만났다. 그녀의 부모로부터 결혼허락을 받은 고씨는 곧바로 잉가와 결혼했다. 하지만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불화가 시작됐다. 말이 통하지 않는 잉가에게 답답함을 느낀 고씨가 구타를 일삼은 것.
반면 잉가는 업체의 소개와 달리 고씨가 재산도 없고 게다가 시어머니와 함께 살아야 했던 삶이 더없이 불편했다. 결국 이날 공항에서 파국을 맞이한 이들 부부. 잉가는 이혼에 관한 처리가 마무리되는 3주 뒤 러시아로 돌아갈 예정이다.
지난달 러시아대사관을 찾은 따냐(22)도 비슷한 경우다. 업체의 소개를 통해 지난해 중고차 판매원과 결혼한 그녀는 줄곧 남편의 폭행에 시달려야 했다. 남편의 폭행 이유는 잉가와 마찬가지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지난달에도 이들 부부는 서울 장안동을 지나던 중 차 안에서 다시 싸움을 벌였다. 매정한 남편은 오갈 데 없는 따냐를 길에 버려두고 사라져 버렸다. 대사관측에서는 남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연락조차 닿지 않았다. 결국 대사관에서는 2주 뒤 남편의 동의없이 따냐를 러시아로 보내야 했다.
지난해 한국인 남편을 서울 관악경찰서에 고소한 마샤(21)도 딱하기는 마찬가지. 지난 2001년 한국인 남성과 결혼에 성공한 마샤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시달려야 했다. 유흥업소에 종사하던 남편이 밤마다 항상 변태적 성행위를 강요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잠자리에서 환각제 복용을 강요한 적도 있었다.
견디다 못한 마샤가 이를 거부하자 남편은 폭력까지 행사했다. 결국 마샤는 동네 종교인의 도움을 받아 지난해 병원진단서를 들고 경찰을 찾았다. 업체에 속아 한국에서의 결혼생활에 실패한 마샤는 남편으로부터 “러시아에 꼭 돌려보내겠다”는 각서를 받은 뒤 고소를 취하했다.
이처럼 현재 러시아대사관에는 매주 3∼4명의 러시아 여성이 이혼 문제를 상담하기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다. 대사관 관계자는 “공신력 있는 업체 대신 얄팍한 상혼에 물들어 있는 결혼정보업체가 난립해 방문동거비자를 통해 입국한 러시아 여성 역시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 있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예술흥행비자가 문제 되자 법무부에서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임시적으로 발급을 막아 놓았지만 공연기획사들이 집단 소송이라도 제기하면 어떤 대응책이 있는지 의문”이라며 한국 법무부측의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