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2일 서울경마공원에서 열린 그랑프리(GI)에서 미스터파크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모습. 안락사 시킨 불운의 명마 미스터파크는 스피드 지구력이 뛰어난 말이었다. 연합뉴스
쇼트트랙의 경우에 우리 선수들이 1000미터 이상의 장거리에 출전했을 때 자주 구사하는 작전이 있다. 속도가 붙기 전에 초반에 앞선을 장악한 후 서서히 페이스를 올리는 것이다. 다른 나라 선수들이 앞장을 설 땐 속도를 줄이면서 힘 안배를 하기 때문에 엎치락뒤치락하기 일쑤지만 우리 선수들은 반대인 것이다. 이 경우 뒤에서 호시탐탐 추월할 기회를 노리는 선수들도 자기 페이스를 지킬 수 없다. 속도를 내지 않으면 뒤처지기 때문이다. 남은 거리가 줄어들수록 앞에선 가속이 붙기 때문에 따라가다가 끝나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쇼트트랙 국가대표 여자 선수들은 예선부터 준결승까지 거의 이런 식으로 상대를 압도해버린다.
경마에서도 스피드 지구력이 뛰어난 말들이 있다. 이런 말들은 대체로 1000미터 단거리부터 2000미터 장거리까지 전천후로 활약을 해준다. 명마들 중에도 스피드 지구력이 좋은 말들이 많았다. 현재 전성기는 지났지만 여전히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 하고 있는 당대불패, 그리고 지난번 경상남도지사배(GⅢ) 대상경주에서 아쉽게 우승을 내주고 2위를 했던 조이럭키가 대표적인 예다. 불운의 명마 미스터파크도 비슷한 유형이다.
당대불패나 미스터파크는 선행형에 가깝지만 선입전개를 해도 전혀 경주력에 영향을 받지 않은 말이다. 선두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와치빌리지, 플라이톱퀸처럼 ‘빠른 발’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초반 스피드도 가속력과 탄력으로 올리는 스타일이다. 그리고 중간에 페이스를 늦추는 법이 거의 없다. 일정한 페이스로 달려가거나 속도가 조금 느리다 싶으면 조금씩 가속을 하면서 레이스를 한다. 이럴 경우 누군가가 총대를 메고 이 말의 페이스를 깨지 않는 한 이 말을 이길 기회는 거의 없다.
일반적인 경주에선 실전의 착차가 능력차이보다 적게 나타난다. 뒤따라가는 말은 보통 거리를 좁히면서 경주를 끝낸다. 하지만 스피드지구력이 뛰어난 말들이 레이스를 주도할 때는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중하위권 말들이 따라가느라 제풀에 지칠 때가 많고, 특히 중반에 일찍 가세하기 위해 힘을 썼다가 참패를 당하는 말들도 자주 나온다.
조금 오래된 얘기지만 지난해 3월 당대불패와 미스터파크가 맞장을 뜬 경주를 보면 이해가 쉽다. 당시 편성은 이 두 마리가 우세를 점하긴 했지만 26마신이라는 큰 차이가 날 것이라곤 아무도 예상 못했다. 그 레이스를 자세히 보면 스피드 지구력이 빚어낸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대불패와 미스터파크는 초반에 조금 느슨하게 출발해 어깨를 나란히 했고, 이후에도 단박에 결판을 내지 않고 서서히 페이스를 올리면서 경쟁을 했다. 특정구간에 스피드를 올린 것이 아니라 전 구간에 걸쳐 조금씩 페이스를 올렸고 뒤따라가는 말들은 이 같은 페이스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승선에 와서는 거리가 더욱 벌어져 2위마와 3위마의 착차가 26마신으로 벌어진 것이다.
지난 11월 17일 경남도지사배(2000미터) 경주도 마찬가지다. 조이럭키가 초반에 우승터치의 도전을 가볍게 뿌리치면서 서서히 스피드를 올리자 다른 말들은 아예 따라붙지도 못했다. 초반에 억지로 따라붙었던 몇몇 말들은 아예 큰 차이로 지면서 망신을 톡톡히 당했다. 물론 그 바람에 조이럭키의 페이스가 빨라졌지만 조이럭키는 끝까지 선전해 2위를 했다. 당시 경주를 본 필자는 우승한 시크릿위스퍼보다 ‘조이럭키가 더 세다’는 느낌을 받았다.
경주당일은 부경 경마장은 ‘안쪽 필패, 외곽 필승’으로 분석됐을 만큼 안쪽 펜스 부근에 모래가 많이 쌓여 있었는데, 조이럭키가 그곳을 뛴 것이다.
그렇다면 스피드 지구력이 뛰어난 말들은 어떻게 찾아내야 할까. 단거리부터 장거리까지 실전경주를 다 보고나면 판단하기 쉽겠지만 그 경우는 남들도 같은 결과를 도출하기 때문에 베팅메리트는 없다. 필자의 경우는 혈통을 체크해 실전데이터와 비교한다. 단거리나 장거리에만 특화된 혈통보다는 단거리에서 장거리까지, 경주거리에 상관없이 좋은 성적을 낸 말들을 체크해두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들이 실전에서도 전 구간을 일정한 페이스 이상으로 꾸준히 뛴다면 스피드지구력이 뛰어난 말로 인정한다.
당대불패의 조부와 외조부는 1000미터부터 2000미터 경주까지 전 구간을 잘 뛰었던 전천후 경주마였다. 미스터파크도 마찬가지다. 조부마(Forty niner)는 당대불패와 같아 그렇다치고 외조부(Formal gold)도 1200미터부터 2000미터까지 좋은 성적을 올렸던 말이다. 조이럭키도 모계 쪽은 스프린터적인 성향을 보이지만 부계 쪽은 전천후다. 부마(Vicar)도 단·중거리에서 고르게 활약을 했지만 조부마(Wild again)가 1200미터 단거리에서부터 2000미터 장거리까지 넘나들었던 전천후였다.
단거리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린 말이 장거리에서도 좋은 활약을 했다는 점은 뛰어난 스피드와 지구력을 겸비했다는 반증인 것이다. 따라서 신마들의 혈통을 분석할 때 선조들의 거리적 특징을 메모해 놓으면 앞으로의 행보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히 한국경마는 승군할수록 거리가 늘어나기 때문에 상당히 유용하다. 단거리에서 중·장거리로 넘어갈 때 거리적응 능력을 진단할 수 있는 자료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스피드지구력이 뛰어난 말들이 무너지는 경우도 있다. 특공대가 투입됐을 때다. 자폭하는 심정으로 무모하게 선두권을 강탈하거나 레이스를 빠르게 이끌어 페이스를 깨버리는 경우다. 두 번째는 부담중량이 한계치를 넘어섰을 때다. 이 때는 페이스가 조금 느리게 전개돼도 막판까지 버티지 못하는 모습을 종종 보인다.
김시용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