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찬 전 국정원장 | ||
이 전 원장은 서울 신교동 우당기념관에서 가진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북지원설과 관련해 “현대상선은 (회사의) 일부 돈을 북한에 건넸을 것”이라며 “이는 올바른 기업활동이 아니지만 북한이라는 특수한 상대와의 비즈니스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20일 북한에서 극비리에 귀환한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이 “대북지원은 터무니없는 얘기”라며 관련 의혹을 일축한 것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어서 향후 파문이 예상된다.
이 전 원장은 또 “98년 국정원장 재직시 현대가 (사업비용 이외에) 수백만달러를 뒷돈으로 건네 이를 경고한 적이 있다”면서 “삼성, 대우 등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유로 경고를 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고 정주영 회장의 소떼몰이도 따지고 보면 뒷거래였다”면서 “당시 대북사업에 관심을 가졌던 대우와 삼성도 과다한 돈을 북한에 지불했다”고 덧붙였다.
이는 DJ정부 초기 삼성-현대-대우그룹과 통일교측이 대북사업권을 놓고 북측에 치열한 로비를 벌여 국정원까지 나서 이를 제지한 것 아니냐는 추측까지 가늠케 하는 대목이다. 또한 대북사업을 해온 국내 기업이 북한과 불투명한 돈거래를 해왔음을 공식 확인하는 것으로 대북사업에 있어 또다른 진통이 예상된다.
▲ 이종찬 전 국정원장(왼쪽)과 김대중 대통령. | ||
한편 이 전 원장은 민주당 내분사태와 관련해 후보단일화 입장을 나타냈으며,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에 대해서는 포용력과 자기희생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또 김대중 대통령의 공과에 대해 “IMF 해결, 한반도 긴장완화, 국제적 위상 제고 등을 치적사항으로, 국내정치 불안에 대해서는 잘못된 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다음은 이 전 원장과의 일문일답.
―현재 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있다. 민주당의 내분사태을 어떻게 보나.
▲후보단일화에 찬성한다. 노무현 후보는 후보선출 이후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국민들은 변화를 원했지만 노 후보는 그런 변화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지나친 개혁적 성향은 시대흐름에 맞지 않다. 여론조사에서 낮은 지지도는 그것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렇다고 정몽준 의원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러 주자들이 다 참여해서 단일후보를 내라는 것이다.
―당선가능성이 높다는 이회창 후보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이회창 후보는 역대 대선주자들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는 원내 의석 수 과반이 넘는 정당의 후보다. 그의 말이라면 의원들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는 또한 영남이라는 지역적 지반을 가지고 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등 이른바 메이저 신문들로부터 튼튼한 지원도 받고 있다. 경쟁할 만한 상대 후보 또한 없다. 그는 이처럼 유리한 상황에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지지도는 35%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는 딜레마에 빠졌다. 비록 그가 당선된다하더라도 (국민적) 갈등은 여전할 것이다. 이 후보는 앞으로 포용력과 자기희생 정신을 실천적으로 보여줘야 한다.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에 대한 수사가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병풍을 어떻게 보나.
▲병풍에 대해 흥미도 없다. 나는 이 후보 개인보다 한나라당 의원들에 대해 묻고 싶다. 그들 중에는 상당수가 군에 안갔거나 자제들이 면제됐다. 총체적으로 창피한 일이다. 그런 정당은 석고대죄해야 한다.
―국민의 정부는 정권 초부터 병역비리에 대해 수사해 왔다. 국정원 초대원장으로서 이에 대한 지원은 없었나.
▲국정원에는 존안자료가 많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관련 자료를 제공했을 것이다. 물론 존안자료라는 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 신문 등 언론에 보도되는 수준의 것이다. 따라서 수사에 관여하거나 하는 일은 절대 없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업적을 평가한다면.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빛날 것이다. 한반도 긴장완화, 국가간 외교활동, IMF 해결 등에 있어서는 큰 역할을 했다. 특히 IMF 극복과정에서 실시한 기업 구조조정은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일본 말레이시아 등이 우리를 본보기로 꼽고 있다. 물론 공적자금 투입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 국부가 유출됐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회수가능성은 충분하다.
―한반도 긴장완화 차원에서 햇볕정책은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부작용도 있다.
▲한반도 긴장완화는 큰 성과다. 군비 경쟁과 같은 낭비적 요소를 막은 측면이 강하다. 하지만 군의 기강이 이완된 것도 사실이다. 최근 정보부대의 한 책임자가 국회에서 군사기밀을 폭로한 것도 부작용의 한 사례다. 그는 엄청난 잘못을 했다. 그가 공개한 블랙북에는 우리 군이 파악한 북한군의 암호체계가 들어있었다. 그런데 이를 공개하는 바람에 북한군으로 하여금 암호를 바꾸게 하는 꼴이 됐다. 우리로서는 엄청난 손실이다. 북한군의 암호체계를 다시 파악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어간다.
―햇볕정책의 성공을 위해 우리 정부가 북한의 눈치를 너무 본 것은 아닌가.
▲햇볕정책 때문에 북한에 굽실거리는 것은 잘못됐다고 본다. 북한에 대해 당당하게 행동해야 한다. 물론 하나 주면 하나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상호주의는 잘못됐다. 북한과 우리는 형편이 다르다. 불균형 상호주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북한에 가서 알랑거리고, 김일성 동상이나 시신 앞에서 절을 하곤 하는 것은 북한의 눈치를 보는 증거다. 정부 고위관료 출신 인사 중에 그런 행동을 한 인사가 있다.
―김 대통령의 실정은 어떤 것들이라고 보나.
▲ 이종찬 전 국정원장 | ||
―국정원장 시절 대통령 아들에 대한 보고는 없었나.
▲김홍일 의원과 홍업씨에 대한 보고는 직접 하곤 했다. 김 의원에 대해서는 건강문제가 주요 보고대상이었다. 그는 건강이 좋질 않았다. 3남 홍걸씨는 미국에 체류중이어서 특별한 정보가 없었다. 문제가 됐던 최규선씨에 대해서는 정권 초부터 대통령에게 반대 의사를 분명히 나타냈다. 최규선은 조지 소로스와 함께 국내에서 파이낸셜 캐피탈과 같은 회사를 만들려고도 해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청와대는 그 친구를 해외로 보내려 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 친구가 나중에 홍걸씨와 권노갑 고문을 등에 업고 다시 나타나 나중에 놀랐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그에게 경고를 하거나 할 자리에 있질 않았다.
―YS정권 당시 안기부가 DJ의 노벨평화상 수상 방해공작을 폈다는 얘기가 있다. 사실인가.
▲사실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이 노벨평화상을 받으려했다. 집권 당시 외무부 관계자는 노벨위원회쪽에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등 일정 역할을 했다. 그런데 노벨위원회에서는 DJ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졌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안기부가 DJ가 노벨상을 타지 못하도록 방해공작을 폈다. 당시 안기부는 노벨위원회 관계자들에게 ‘DJ는 나쁜 사람이다’라는 식의 정체불명의 투서를 보내곤 했다. 98년 국정원장으로 취임한 후 방해공작과 관련한 서류들을 확인했다. 감찰실을 통해 이런 역할을 한 사람들을 조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 인사상의 불이익을 주지 않았다. 그들도 윗선의 지시에 따랐을 테니까.
―DJ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일정 역할을 했다는 얘기가 있다.
▲지난 95년 국민회의 소속 국회의원으로 있을 때다. 그때 노벨위원회 사무총장을 만난 적이 있다. 내가 DJ에 대해 얘기를 했더니 그 사무총장이 말하기를 ‘DJ는 이미 수상 기회를 놓쳤다. 87년 대선 당시 야당 단일화에 실패에 대한 책임 때문이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처럼 노벨위원회는 추천된 사람들에 대해 엄청난 자료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특정인사의 로비가 통하지 않는다.
―최근 언론에 최규선씨가 작성했다는 노벨평화상 수상을 위한 프로젝트 문건이 보도된 적이 있다. 어떻게 보나.
▲그 친구가 만든 문건은 청와대 등 공식라인과 전혀 상관없다. 그 친구 혼자 설친 것이다. 문건에는 미국을 상대로 로비를 하는 것으로 돼 있는데 미국은 노벨상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역효과만 낸다.
―DJ정부의 대북정책과 현대의 대북사업은 일정부분 관계가 있어 보인다. 국정원장 출신으로서 어떻게 보나.
▲국민의 정부 초기에 현대와 통일교측은 대북사업을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했다. 통일교측은 금강산관광 사업에서 하루 코스의 단거리를 선호했고, 현대는 2박3일의 코스관광을 원했다. 국정원장 재임시절 정몽헌 회장과 이익치 김윤규씨 등이 나를 찾아왔다. 금강산 관광에 대한 얘기였다. 장전항에 호텔 신축과 카지노 사업 건도 포함됐다. 현대측이 금강산 관광을 추진하면서 북측과 합의한 조건 중에 눈길을 끄는 특별한 사항이 있었다. 북한 장전항에 대한 독점적 사용권을 현대가 갖는다는 항목이었다. 장전항은 사실 간첩선 남파와 관련한 대남사업의 핵심 역할을 해온 군항이었다. 현대가 장전항에 대해 독점권을 갖는다면 그만큼 우리측 안보에 상당히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다. 정부와 현대는 목적은 달랐지만 상호보완적인 측면이 있었다.
―당시 현대의 대북사업에 대해 적극적인 찬성의사를 나타냈나.
▲사업 초기에 현대가 북측에 돈을 너무 많이 지출한다고 생각했다. 국정원장 시절 한 번은 현대가 특정 사업을 하면서 (사업성공을 위해) 수백만달러를 북측에 뒷돈으로 건넸던 적이 있었다. 나는 현대측에 엄중 경고했다. 당시 현대뿐만 아니라, 삼성 대우 등에 대해서도 뒷돈 거래를 하지 말라고 경고를 했다. 나는 현대가 관광사업 대가로 북측에 현금을 지불하는 방식에도 반대했다. 달러가 필요한 북한이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비료나 쌀 등 현물로 지불하는 방식을 권했다. 하지만 현대와 북한이 현금납부 조건으로 합의하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최근 현대상선의 4천억원 대출과 관련해 대북지원설이 제기되고 있다.
▲대북지원설은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돈을 줬다는 것이 요지다. 그러나 남북정상회담 대가로 돈을 줬다는 것이 말이 되나. 남북정상회담은 베를린 선언이 결정적이었다. 이후 한국정부가 북측에 대해 관대해 하는 것을 보고 북한은 정상회담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대북지원설과 같은 오해를 풀기 위해서라도 계좌추적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 입장에서는 상당히 난감할 것이다. (추적을 하면) 현대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현대상선의 4천억원은 유동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됐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상선은 사업상의 이유로 일부 돈을 북한에 건넸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올바른 기업활동이 아니지만 북한이라는 특수한 상대와의 비즈니스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이해된다. 하지만 투명성을 확립하기 위해 국정원장 시절부터 뒷돈을 주지 말라고 경고를 했었다. 나는 현대가 북한과 장사하는 과정에서 뒷거래는 어느 정도 있었다고 본다.
―최근 정부기관의 기강해이와 정보유출이 문제가 되고 있다. 국정원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나.
▲97년 대선 때 일이다. 당시 안기부 고위직에 있던 Y씨가 DJ를 만나러 왔다. 그는 여론이 DJ쪽으로 기울자 안기부의 최고급 정보를 들고 DJ를 만나러 온 것이다. 물론 우리 쪽에 도움이 됐지만 그 사람은 국가정보를 훔쳐 정치권에 팔아먹었던 셈이다. 지금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일부 인사가 정치권 줄대기를 하는 바람에 국정원이 이 모양이 됐다. 나는 지금 누가 그런 짓을 하는지 대충 안다.
백승구 기자 eag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