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학자 김철우 씨
김 씨는 1926년 시즈오카의 가난한 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일제강점기 경상도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재일한인 1세로, 열심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환경에서 김 씨는 공부에 매진해 도쿄공업대학과 도쿄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도쿄대에 연구교수로 임용됐다. 당시 외국인은 공무원이 되지 못한다는 규정에도 불구하고 실력 하나로 국립대 교수가 되면서 많은 한인에게 희망을 줬다.
고인은 지난 2006년 포스코 사보에 기고한 글에서 “1964년에 우리말을 거의 못하는 공학도로서 처음 조국에 들어왔을 때, 나는 부산의 제일제당, 대구의 제일모직, 영월의 화력발전소 등으로 안내받았다. 기껏 그게 자랑거리인 우리나라가 너무 가난해 보여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는데…”라고 적었다. 일본서 나고 자란 그가 가난한 조국의 실상을 보고 기꺼이 자신의 재능을 조국을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같은 글에서 고인은 청와대에 들어갔던 일화도 언급했다. 철광석 성분 분석 차 강원도의 한 탄광으로 가기 위해 김포공항에 내리자 청와대의 경제비서가 그를 맞았다고 한다. 남산의 외교구락부로 가서 박태준 사장, 박충훈 상공장관, 윤동석 박사를 만났다. 박 대통령은 베트남 대통령 방한 일정이 겹쳐 만나지 못했다. 기술문제가 제기되자, 그는 교육을 시키면 한국인은 머리가 좋으므로 빨리 익힐 것이라고 말했다.
그 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중공업 연구실장을 맡아 일본과 국내를 오가며 제철 전문가들을 만나고 GEP(일반기술계획)를 검토했다. 1971년부터는 포스코의 간곡한 요청으로 도쿄대를 휴직하고 건너와 기술담당이사와 270만 톤 계획위원장을 겸임하는 등 제철소 건립을 주도했다.
그러나 조국은 그에게 영광만을 주지 않았다. 1973년 제철소 준공을 한 달 앞두고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6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70년에 북송된 형제들을 만나고 왔다는 혐의였다. 형제들을 만나게 해주겠다는 제의를 받고 북으로 건너갔지만 북 정권은 그를 황해제철소로 데려갔다. 공정 개량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음에도 형제들을 만나게 해주지 않았고, 결국 빈손으로 돌아와 씻을 수 없는 고초를 겪게 된 것이다.
앞서의 글에서 고인은 “반공법, 국가보안법을 모르고 살아온 나의 실수가 그토록 가혹한 상황으로 몰아갔던 것은 분명히 극단적 냉전체제의 비극이었다”며 “나로 인해 졸지에 고생한 고향 친척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다시 떳떳해져야 했다”고 담담히 적었다.
그는 고문을 동원한 강압 수사로 ‘간첩 혐의’를 자백하고 억울한 마음에 구치소에서 동맥을 끊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포항제철 준공식이 열리던 날에도 그는 서대문구치소에 수감돼 있었다. 1979년 가석방 후 다음해 사면됐으나,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 고인은 지난해 11월, 무죄 선고를 받고 39년 만에 간첩 혐의를 벗었다. 1980년 그가 군사 정권의 권유로 영구 귀국할 때 동료들이 한국에서 그런 고초를 당하고도 왜 다시 돌아가느냐며 말리자 그는 “나는 철을 사랑하네”라고 짤막하게 답했다고 한다.
고인은 귀국 후 1989년 포항제철 부사장대우로 정년퇴임했다. 별세 전까지 국내와 아시아지역의 중견·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국제 기술이전기관을 설립, 기술지원을 해왔다.
한편 (사)한국테크노마트 관계자는 고인에 대해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며 “항상 본인보다 남이 잘 되는 것이 먼저였고 이득을 바라고 남을 도와준 적은 없다”고 전했다.
신상미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