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4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난 백인엽 예비역 중장의 빈소에서 한 조문객이 조문을 하고 있다. 뉴시스
남한에서도 군인이 되고자했던 백 장군은 곧장 군사영어학교 1기로 임관해 2년 뒤 육군 제17연대장에 임명됐다. 평범하게 흘러갈 것만 갔던 그의 군인생활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격렬한 전쟁이 3개월째 지속될 무렵 우리 수도사단은 경북 청송 부근에서 북한군의 포위공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국방부는 지휘책임을 묻고자 사단장 교체를 결정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을 잘하는 사람을 임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신성모 국방장관이 백 장군을 추천했고 그의 나이 27세에 수도사단장에 올랐다. 국군 역사상 최연소 사단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지휘관으로서 백 장군의 활약은 대단했다. 북한군 12사단을 타격해 낙동강 방어선의 중동부 지역을 사수하는 한편 인천상륙작전에도 투입돼 수도권 탈환에 앞장섰다. 사실 백 장군 입장에서 인천상륙작전은 그다지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이미 백 장군은 사단장이었으나 작전에 참여하기 위해선 연대장으로 직급이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국방장관도 이 부분에 대해 염려스러워하며 본인에게 의사를 물었는데 그는 “전쟁을 하는데 사단장이면 어떻고 연대장이면 어떤가. 중대장도 괜찮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자신의 명예보다는 조국의 승리만을 생각했던 백 장군은 마침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며 북한군의 퇴로 차단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전쟁 내내 어떤 상황에서도 용맹함을 잃지 않아 ‘천생 군인’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유별나게 엄격하고 융통성 없었던 그의 성격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휴전이 선언되면서 백 장군은 새로운 인생을 계획했다. 군인으로서 단 한 번도 실패를 겪어보지 않았던 백 장군이 뜬금없이 1958년 현역 장성 신분 최초로 교육 사업에 뛰어든 것.
하지만 교육자로서의 백 장군은 결코 탄탄대로를 걷지 못했다. 경영난을 겪던 성광학원을 인수한 백 장군의 교육 사업은 처음부터 삐걱거렸다. 박정희 정권이 출범한 1961년 부정부패 척결사업의 강도 높은 조사에 결국 구속돼 무기징역 및 추징금 7000여만 원까지 선고받은 것. 그러나 백 장군은 불과 10개월 만에 재단으로 돌아왔다. 여기에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형 백선엽 장군의 노력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같은 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출신으로 1948년 박 대통령이 이른바 여순사건 당시 좌익 혐의로 체포돼 사형이 구형되자 이를 구해준 바 있다.
짧은 수감생활 이후 백 장군의 교육 사업은 승승장구했다. 1965년 형과 본인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선인재단으로 이름을 바꾼 뒤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모든 교육과정에 손을 댔다. 덕분에 선인재단에 소속된 학교만 14개에 이르렀으며 국내 최대 사학재단으로 성장했다. 당시 인천시민들 가운데 선인재단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또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1981년 전두환 정권 시절 백 장군은 두 번째 구속을 당했다. 이번엔 사립학교법, 건축법, 중기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였다. 다시 법의 심판을 받게 될 경우에는 어떤 판결을 받을지 몰랐던 그는 엄청난 결심을 한다. 당시 기준으로 1000억 원대에 이르는 선인학원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 덕분에 백 장군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었다.
사실 백 장군의 두 번째 구속은 박정희 정권이 물러나면서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든든한 배경이 있었던 그는 교육계의 대통령으로 군림하면서 무지막지한 경영을 펼쳤다. 일례로 선인학원의 근거지라고 할 수 있는 인천시 남구 도화동은 본래 중국 화교들의 공동묘지가 있던 곳이었다. 무허가 판자촌이 즐비한 가난한 사람들의 동네이기도 했다. 학교를 지을 터가 필요했던 백 장군은 주민들에게 협상이 아닌 불도저를 들이댔다. 사람들이 살고 있던 동네를 중장비로 밀어버리고 학교를 세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백 장군은 인천대학교 및 전문대 학생들에게 정장 차림을 의무화하고 교사들을 제멋대로 해고하는 등 납득하지 못할 행동들을 이어나갔다. 이러한 그의 ‘기행’은 결국 자신의 발목을 잡는 꼴이 된 것이다.
하지만 백 장군은 불사조와 다름없었다. 국가에 재단을 내놓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자문위원이라는 미명 아래 주인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인천대학교 학생들은 크게 반발했고 해방 이후 학내 분규 최초로 휴교령이 내려지는 심각한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로부터 13년 동안 백 장군과 학생들 사이의 싸움은 계속됐고 결국 또 다시 정권이 바뀌고서야 그는 선인재단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1994년의 일이었다.
물론 이마저도 자발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고 선인재단 부정부패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되려 하자 어쩔 수 없이 사퇴를 선언한 것이다. 결국 1994년 백 장군은 시립대학과 유치원, 초·중·고등학교 14개를 인천시와 인천시교육청에 기증하며 교육자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이후 백 장군은 바깥활동을 자제한 채 지내다 지난 12월 14일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군인으로서는 최고의 길을 걸었지만 교육자로서는 여러 뒷말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졌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