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형 직전의 장성택 모습으로 YTN 캡처 이미지다.
“장성택의 한 측근이 제3국을 통해 우리 쪽 대북 핫라인으로 접촉해왔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한 고위 정보당국자가 한 말이다. 그는 익명을 요구하며 “당시 장성택이 김정은과의 사이가 틀어지며 북한 내에서 입지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는 것에 대해 크게 불안해하고 있다고 했다. 장성택을 빙자한 일부 측근들 주장일 수도 있어 여러 채널을 통해 확인해보니 사실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며 “장성택 측이 직접 얘기를 꺼내진 않았지만 남측이 망명에 도움을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만약 실현됐다면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망명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파장이 컸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장성택 측이 남측에 SOS를 보낸 시기는 지난 10월 중순경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김정은을 따르는 군부와 장성택 측근들 간 무력충돌이 벌어진 직후다. 얼마 전 미국 <뉴욕타임스>는 지난 9월 말~10월 초 장성택 측이 군과 교전을 벌였다고 보도한 바 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군부대로 시찰 나간 김정은은 병사들 영양 상태가 나쁜 것을 보고 석탄, 꽃게 등의 관할권을 다시 군부로 넘기려 했지만 장성택 측이 이에 반발하다 총격전이 발생했다고 한다. 김정은은 자신의 지시를 받고 출동한 군대가 장성택 측에 패해 돌아오자 대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장성택 역시 북한 체제에서 김정은에게 반기를 드는 행위가 어떤 의미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교전 직후 장성택이 남측과 긴밀한 라인을 구축하려 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 이해해야 할 듯하다. 앞서의 당국자는 “남측으로 접촉해 온 장성택 측근은 현금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도 언급을 했다. 장성택 측은 자신들이 주도하고 있는 이권사업을 조만간 모두 군에 빼앗길 것이라고 걱정하는 것 같았다”며 “어차피 망명을 하거나 북한을 탈출할 거라면 그 전에 최대한의 현금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였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잠깐 최근 몇 년 새 벌어진 장성택과 군부 사이의 치열한 암투를 살펴보자. 장성택이 주도하는 민간당료 계열과 군은 이권사업을 놓고 2009년 초부터 여러 차례 마찰을 빚었다. 2009년엔 리영호 전 총참모장이 이끄는 군으로 이권이 몰리던 시기였지만 같은 해 11월부터는 당이 무역활동 등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년 뒤인 2010년 11월 군이 다시 주도권을 빼앗아 왔다. 당시 군이 북한의 광물자원을 싹쓸이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다시 1년 뒤인 2011년 11월 장성택은 합영투자위원회를 앞세워 군의 이권사업을 대거 넘겨받았다. 김정은 역시 2012년 5월 “군부는 외화벌이에 관여하지 말고 경제개혁은 당이 주도하라”며 장성택에 힘을 실어줬다. 2012년 7월 군 핵심이던 리영호가 숙청되면서 이러한 암투는 장성택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2인자로 승승장구하던 장성택 역시 지난 11월 중순 실각했다. 단순히 이권사업 때문에 장성택이 처형됐을 것으로 속단하기는 이르다는 주장도 여기서 비롯된다.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이 12월 13일 북한 장성택 처형 관련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앞서의 당국자는 “장성택과 군 사이엔 이미 예전부터 갈등이 있었다. 김정은은 이것을 적절히 이용해 왔다. 이권 때문이라면 자신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처리할 필요는 없었다고 본다”며 “리영호 숙청 이후 민간당료의 강화와 군부세력 약화가 명확해 보이던 시점에 이처럼 극적으로 장성택을 공개 처형한 것은 의외다. 아마도 장성택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뭔가를 실행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장성택의 실각 시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여러 설이 있긴 하지만 지난 11월 중순이 유력하다. 장성택 최측근 리용하 제1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이 공개 처형된 무렵인 까닭에서다. 이는 장성택이 남측에 도움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진 10월 중순 이후다. 속단하긴 어렵지만 장성택이 비밀리에 추진하던 남측과의 핫라인 구축이 적발됐고, 이로 인해 장성택 세력이 급격히 몰락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국정원이 세계 최초로 장성택 실각을 알릴 수 있었던 것 역시 장성택 측과의 사전 접촉을 통해 이미 그 사정을 파악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북 입장에선 2인자인 장성택이 남측과 접촉하며 망명까지 고려했다는 사실이 공개되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체제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내부 혼란이 가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의 당국자는 “장성택 처형 판결문을 보면 ‘장성택이 우리 공화국의 인민주권을 뒤집을 목적으로 감행한 국가전복음모행위가 형법 제60조에 해당하는 범죄를 구성한다는 것을 확증했다’고 적시된 부분이 있는데, 아마도 밝히기는 어려운 장성택의 은밀한 움직임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장성택이 처형을 미리 간파하고 남측과 접촉을 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이는 향후 대북관계에도 악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장성택 숙청 이후 고조되고 있는 내부 불만을 해소할 필요가 있는 김정은과 북한 군부가 도발의 명분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관진 국방부 장관 역시 얼마 전 “2014년 1월 하순에서 3월 초순 사이에 북한이 도발할 가능성이 크다”고 밝힌 바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