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0억 원대 금융사기 후 중국으로 도주했던 변인호 씨가 14년 만에 국내로 송환됐다. 법무부는 일단 변 씨의 국내 형 시효가 끝나기에 앞서 잠시 신병을 넘겨받아 시효를 연장한 뒤 중국으로 재송환할 방침이다. 연합뉴스
당시 그를 수사했던 수사 검사는 “도피의 용의주도함에서 신창원을 능가할 수준”이라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하지만 변 씨는 끝내 사기 습성을 못 버리고 중국에서조차 사기행각을 벌이다가 발각돼 길고 긴 범죄 행각을 마무리했다. IMF 당시 수많은 사람들을 눈물 쏟게 했던 ‘변인호 사건’의 풀스토리를 공개한다.
변인호 사건은 1997년 IMF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변 씨는 허술하게 관리되는 금융기관의 약점을 교묘하게 이용했다. 변 씨가 사용한 대표적인 방법은 ‘수출입 대금’ 가로채기다. 유령회사를 설립한 변 씨는 해외에 거주하는 동생들에게도 유령회사를 설립하게 한 뒤 고가의 컴퓨터 부품을 수출입 한다는 명목으로 신용장을 작성해 시중은행 8곳으로부터 수출입 대금을 받아냈다. 하지만 변 씨가 작성한 신용장은 명백한 허위였다. 고가의 컴퓨터 부품이라는 수출입 물품의 실상은 쓰레기에 불과한 ‘폐반도체’였기 때문이다. 변 씨가 이런 식으로 빼돌린 수출입 대금은 무려 ‘2300여억 원’에 달했다.
변 씨가 이용한 또 다른 방법은 ‘어음 사기’. 당시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는 기업이나 대학을 제물로 삼았다. 변 씨는 이들 기업에게 구매자가 없는 융통어음을 단번에 할인해 줘 환심을 샀다. 변 씨를 신뢰한 기업들은 이후 “곧 할인해 주겠다”는 변 씨의 말만 믿고 수백억 원에 달하는 어음을 내줬다. 변 씨는 이렇게 확보한 어음을 다른 데 팔아넘겨 돈을 가로채고 잠적했다. 당시 부도 위기를 맞은 해태전자, 단국대학교 등이 변 씨에게 피해를 입은 대표적인 곳이다.
기업인수합병 사기, 작전세력을 동원한 주가조작 등도 변 씨의 특기였다. 인수합병을 하겠다며 5개 기업으로부터 주식매수자금 ‘1200억 원’을 가로챘으며 증권가에 헛소문을 퍼뜨려 수십억 원을 챙기고 수천여 명에 달하는 개미투자자를 울리기도 했다. 당시 재계와 증시를 교란한 변 씨의 수법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처럼 대담한 사기 행각을 저지른 변 씨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1980년대 초 서울 소재 대학 경영학과를 중퇴한 변 씨는 무역회사를 다니던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사업 노하우가 쌓인 변 씨는 1993년 용산 전자상가에 (주)J&B전자라는 회사를 따로 차려 반도체를 미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반도체 호황기’로 불리던 93년과 95년에 걸쳐 변 씨의 사업은 승승장구했고 상당한 거금을 손에 쥐기도 했다.
잘나가던 변 씨가 꺾이기 시작한 건 1996년. 급작스럽게 ‘반도체 가격 폭락사태’를 맞아서다. 설상가상으로 변 씨가 투자한 한보철강 어음이 1997년 1월 부도를 맞음으로써 변 씨는 순식간에 ‘260억 원’에 달하는 빚더미에 나앉게 됐다. 변 씨가 딴 마음을 먹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다.
오랫동안 무역업에 종사해온 변 씨는 수출입 업무관계로 세관직원과 가까웠기에 그동안 세관의 허점과 무역사기의 수법을 어깨 너머로 보고 듣곤 했었다. 게다가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친누나의 일을 도와주면서 경매, 주식에도 능통했다. 여러 금융사기 수법을 검토한 변 씨는 ‘증권가 풍문’을 첫 번째 도구로 삼았다.
“변 씨 어머니가 증권가 7대 큰손이라는데? 삼성, 현대도 좌지우지한데.”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정말이라니까. 게다가 변 씨 할아버지가 2공 때 외무부 장관을 지낸 변영태 장관이라고 하더라고.”
“와 집안 한번 대단하네.”
당시 증권가와 사채시장에서는 변 씨에 관한 소문이 심심찮게 나돌기 시작했다. 변 씨가 자신의 배경을 과시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퍼뜨린 소문이 당시 금융위기의 뒤숭숭한 분위기와 어우러져 하나둘 먹혀 들어간 것이다. 순식간에 ‘업계 실력자’로 부상한 변 씨를 바라보는 눈도 달라졌다. 하지만 변 씨가 퍼뜨린 말들은 모두 ‘헛소문’에 불과했다.
변 씨는 수출입 대금이나 어음사기 등을 통해 얻은 돈으로 최고급 승용차를 굴리고 특급호텔에만 묵는 등 호화생활을 이어갔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보디가드를 거느리고 지갑에 항상 30억~40억 원에 달하는 채권과 주식을 넣고 다녔다고 한다. 주가조작을 위해 동원했던 ‘작전세력’에게는 수억 원의 사례금을 1만 원 권 신권 다발로 묶어 대형 여행가방에 담아 전달하는 등 대범함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변 씨의 사기행각도 결국 검찰에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주가조작에 대한 정황을 포착한 검찰이 변 씨와 작전세력의 혐의를 밝혀낸 것이다. 검찰은 변 씨와 주가조작에 동조한 증권브로커, 은행 펀드매니저, 증권사 간부 등 7명을 구속기소하고 달아난 일당들을 공개 수배했다. 당시 변 씨를 구속기소한 검사는 서울지검 특수1부장으로 있었던 안대희 전 대법관이었다. 안대희 전 대법관은 언론 인터뷰에서 “건실한 기업 여러 곳의 문을 닫게 하거나 부실화시킨 죄질이 가장 나쁜 인물로 기억한다”며 변 씨 사건을 회상했다.
변 씨는 1998년 1심 재판에서 무역, 어음, 증권사기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는다. 변 씨는 곧바로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런데 변 씨의 마음속에 재판은 안중에도 없었다. ‘대담한 탈출’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어 있던 변 씨는 동료 재소자 한 아무개 씨로부터 “구속집행정지를 기막히게 잘 한다”는 말을 듣고 하 아무개 변호사를 소개받게 된다. 변 씨는 하 변호사에게 ‘2억 원’의 수임료를 건네주며 구속집행정지를 하게 해달라고 의뢰했다.
하 변호사의 전방위 로비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구치소 의무관과 한 일식집에서 은밀하게 접촉한 하 변호사는 “소견서를 유리하게 써 달라”고 부탁하며 3000만 원을 건넸다. 변 씨를 담당하는 교정공무원, 검사를 하는 의료기사에게도 서울 강남 단란주점에서 수백만에서 수천만 원을 건넸다. 1998년 12월 변 씨는 결국 “고혈압과 혈뇨 배출이 심하다”는 이유로 구속집행정지를 받아내기에 이른다. 당시 수사관계자는 “고혈압 증세가 조금 있지만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아내기 위해 변 씨가 일부러 약을 먹지 않아 증세를 더 악화시키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 입원한 변 씨에게는 이제 탈출의 마지막 난관이 남아 있었다. 바로 사기 피해자들이 고용한 사설 경호원들이 변 씨의 병실을 24시간 지키고 있었던 것. 이때 변 씨의 누나가 나서기 시작했다. 변 씨의 누나는 문 앞을 지키던 경호원에게 접근해 “내가 해외에 부동산이 많다. 동생을 빼주면 편하게 살게 해주겠다”고 회유하며 100만 원을 건넸다. 1999년 1월 13일 새벽. 경호원의 방관 하에 변 씨는 병원 창문 밖 난간을 통해 달아난 뒤 누나가 매수한 여행사를 통해 미리 준비한 위조여권으로 1999년 6월 중국행 배에 올라탔다. 10년 넘는 도피 생활의 시작점을 찍은 것이다.
이후 변 씨의 행적은 오리무중에 빠졌다. 변 씨의 은밀한 도피행각은 검찰 추적반의 동향을 수시로 알려주는 또 다른 정보 누설자의 역할 때문에 가능했다. 변 씨를 최초 검거했던 김 아무개 경사가 1000만 원을 받고 변 씨를 도와준 것. 변 씨의 탈출에는 이렇듯 ‘12명’에 달하는 다양한 조력자들이 있었고 돈이 뒤따랐다. 이들은 결국 모두 사법 처리됐다.
완벽하게 보였던 변 씨의 탈출은 중국에서의 사기 혐의가 적발되면서 종착점을 찍었다. 사업 자금을 핑계로 거액의 투자금을 가로채다 2005년 중국 공안에 체포된 것. 중국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변 씨는 한-중 간 범죄자 임시인도 조항에 따라 2013년 12월 21일 국내로 송환되기에 이른다. 우여곡절 끝에 국내로 발을 디딘 희대의 사기꾼 변인호. 그는 결국 14년 전 경제위기를 뒤흔든 금융사기의 죗값을 단단히 치르게 됐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