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안철수 의원의 러브콜을 거절한 정운찬 전 총리가 당분간 정치가 아니라 동반성장에 매진할 것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내가 마치 이사장이 되고픈 욕심이 있는 것처럼 보도돼서 개인적으로 마음이 불편하다. 서울대평의회, 교수협의회 등에서 몇몇이 찾아와 ‘서울대 입장을 누구보다도 잘 대변해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봉사하는 마음으로 와 달라’며 이사직을 부탁을 했다. 그렇게 15명의 이사들 중 한 명이 된 것뿐이지, 이사장직에는 관심 없다.”
—2013년 12월 김종필 전 총리의 기념사업회에 ‘깜짝’ 축사를 해 정계의 주목을 받았는데.
“(김 전 총리와) 서울대와 고향 선후배 사이다. 그런 연유로 초대받았다.”
—김 전 총리와 각별한 사이 아닌가.
“아니다. 처음 뵌 게 (내가) 총리하고 난 다음이다. 김종필 총리님과는 세종시 문제 등으로 몇 번 뵌 게 전부다.”
—김 전 총리에 대한 평을 한다면.
“한국에 그만한 ‘인텔리’도 없다. 마음만 먹었으면 쉽게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공정의 길로 가느라…. 그런 면모가 긍정적으로 기억에 남은 것 같다. 당시 기념사업회에서 나름 균형적인 시각으로 축사를 했는데 일부 언론에서는 내가 ‘김종필 찬가’를 불렀다고 흉을 봤더라고(웃음).”
—2007년 야권의 대선후보로, 2012년 여권의 대선후보로 두 차례나 언급됐다. 출마를 하지 않은 이유는.
“정치를 해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던 것 같다.”
—특히 2007년 대선에선 정 전 총리를 향한 국민적 열망이 꽤나 뜨거웠다. 당시 특별한 비화라도 있나.
“조순 전 서울시장,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등이 ‘공부한 사람이 사회에 책임을 다해야지’라고 하시며 적극 밀어주시는 통에 2007년 1월 중순이 되어서야 대권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후 약 2개월 여 동안 전국 대학을 다니며 생각을 해봤지만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싶더라. 정말이다.”
—김종인 전 경제수석이 ‘대선 나가라’며 등을 떠밀었나(웃음).
“그냥 미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등을 밀어버리려고 하시더라(웃음).”
—그런데 2007년 4월 30일경 대선불출마 선언을 했다.
“보궐선거에 혹시라도 영향을 줄까봐 선거 후 불출마 선언을 했다.”
—당시 민주당에서 대선후보로 영입하려고 했던 일은 유명하다. 그런데 여권에서도 누가 찾아왔단 말도 있는데, 사실인가.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이 그 무렵 계속 ‘만나자’고 하시더라. 사실 한 번도 제대로 뵌 적은 없는 분이었다. 기존 정치인인 윤 전 장관을 만나게 되면 혹여나 내게 ‘정치하라’고 권유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심스레 만남을 거절했다. 그런데 계속 윤 전 장관을 뵙지 않은 상태서 불출마 선언을 해버리면 그 분께 혹시 모를 무례를 범하는 게 아닐까 해서 불출마 선언 날을 며칠 앞두고 처음으로 독대하게 됐다.”
—윤 전 장관과의 만남에서 무슨 말이 오갔나.
“한국 최고의 정치인 감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싸우는 걸 보니 ‘히트앤 런어웨이’를 제대로 하는 몇 안 되는 인물이라며 덕담을 해주시더라.”
—지난 대선에선 문재인 의원을 지지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지지한 적 없다. 왜 그런 보도가 나왔는지 알 길이 없다.”
—대선 당시 만난 적은 없는가.
“한 번 있다. 그 전까진 개인적으로 만난 적 없다. ‘동반성장 정책은 문 의원이 제일 가까운 것 같으나 지지는 못해주겠다’는 뜻을 분명히 전했다. 그런데 다음 날 신문을 보니 내가 문 의원을 공식적으로 지지했다고 하더라. 그동안 나에 대한 오보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때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적극 부인했어야 했나 싶다.”
—최장집 교수, 전성인 교수 등 안 의원을 떠나는 인사들이 적잖다.
“전성인 교수가 떠났다는 얘기 듣고 놀랐다. 그런 인물을 왜 나가게 나뒀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 젊은 경제학자들 중에선 최고의 인물인데 그걸 못 잡으면 어떡하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정 이사장을 총리로 모셔오려고 ‘오고초려’ 했지 않은가. 안 의원이 ‘육고초려’라도 하면 손을 잡을 생각이 있는가.
“그럴 생각 없다. 안 의원에 대한 이야기는 그만 했으면 좋겠다.”
—박근혜 정부의 지난 1년, 어떤 게 가장 염려되나.
“경제학자다 보니 우선 경제 부문이 염려된다. 80년대 8%대, 90년대 6%, 2000년대 4%, 그리고 2010년대에 들어와서는 2~3%의 경제 성장을 보이고 있다. 이 추세가 계속된다면 조만간 2%대로 성장하는 나라가 될까봐 걱정이다. 경제학자들은 잠재적으로 4.5%의 경제성장률을 보일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지만 현재로선 확신하기 어렵다.
—해법이 있다면.
“성장하려면 투자가 이뤄져야 하는데, 투자를 하는 데에는 이런 저런 규제가 많다. 일각에선 경제정책에 일관성이 없기에 투자가 힘들다고 하는데 물론 일리 있는 말이다. 그러나 투자는 기업이 하는 거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역할에 차이점이 있을 것 같다.
“대기업의 경우 돈은 천문학적으로 많지만 투자대상인 핵심 첨단기술이 부족하다. 반면 중소기업은 중저위기술은 많은데 투자를 못한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장기적인 측면으로 대기업에는 핵심 첨단기술, 중소기업에는 돈이 지원돼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은 그동안 창조경제란 말만 했지, 그들 중 누구도 이를 통해서 중장기적 플랜을 설명하지 않았다. 그 점이 매우 아쉽다.”
—이를 성공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
“창의성이 필요하다. ‘창조경제’가 아니라. 중기적으로 한국의 ‘R&D’(Research and Development·연구개발)를 ‘D’(개발)에서 ‘R’(연구) 쪽으로 방향 전환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교육혁신을 통해 국민이 창의적인 사고에 익숙해지도록 도와야 한다. 결국 시간이 필요하다. 단기적으로 당장 급한 건 ‘동반성장’이다. 중소기업에 돈이 흘러들어가게 해야 한다. 적어도 돈 없어서 투자 못하는 상황은 개선해야지.”
—개발의 지반은 탄탄히 잡혀 있다고 보는가.
“창원, 울산, 포항, 구미, 광양, 기흥, 탕정 등에 세계적인 공장은 이미 많이 있다. 그에 반해 ‘연구’, 즉 리서치가 부족한 편이다. 외국에서 만들어낸 아이디어를 직접 개발하는 건 잘하는데 우리 아이디어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외국을 보라. 화학 물리학 노벨상 받는 사람이 많이 나오지 않는가. 창조란 말을 쓰지 말고 창의적이 되어야 할 때다.”
지난 12월 10일 김종필 전 총리의 아호 운정을 딴 ‘운정회’ 창립총회에 참석한 정운찬 전 총리.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그냥 싫다(웃음). 창조가 뭔지 제대로 설명도 안하면서 계속 창조라고 하니 싫은 거지.”
—그렇다면 ‘창의’는 무엇인가.
“‘창의’는 사물을 지금까지의 시각과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려면 독서, 여행, 타인과의 경험을 기반으로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해야 한다. 애석하게도 요즘은 독서는 안하고 인터넷만 하고 사람도 잘 안 만나는 것 같다. 이래서는 창의적이기 어렵다. 이것을 교육 혁신을 통해서 바꾸는 수밖에….”
—‘창조경제’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런 말장난 하지 말았으면 한다. 대체 누가 아이디어 냈는지 모르겠다. 아무도 창조경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더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경제’라는 슬로건이 대선에선 통했다.
“고등학교 교과서처럼 옳은 얘기만 하니까 그러지. 한때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어떤 의원의 책처럼.”
—‘창의경제’의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중소기업 위주의 정부 정책과 초과이익공유 방법을 통해서 중소기업에 돈이 들어가게 한다. 이런 식의 투자는 생산, 고용, 소득, 경제전체수요가 순차적으로 늘어나게 할 것이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극심한 경기 침체와 양극화를 완화함은 물론이다. 종국엔 ‘창의경제’가 한국경제의 지속적 성장의 마중물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현재 박근혜 정부가 주장하는 ‘창조경제’는 개발에서 연구로 가는 것에 대한 언급도 없고, 아쉬운 부분이 많다.”
—‘창조경제’도 ‘창의경제’와 비슷한 의미인데 관련 전문가들이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얘기도 있다.
“(정부가) 너무 소통을 안 해서, 거기(청와대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웃음).”
—김종인 전 수석이 박 대통령으로부터 ‘토사구팽’ 당했다는 말도 있다.
“‘순종파’하고만 일해서 되겠나. (김 전 수석처럼) 자기 의견을 확실히 말하는 사람들과도 대화해서 생각을 유연하게 해야지. 그는 새누리당의 총선 승리와 박근혜 정부 집권에 큰 도움이 된 분이다. 민주당이 먼저 발표했어야 할 이슈, 진보적 아이디어를 내놓는 바람에 새누리당이 보수정당이면서도 다양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창조경제’의 2014년도 전망을 내다본다면.
“그것에 대해선 나를 비롯해 아무도 모를 거다.”
—역대정부 사상 최초로 민주노총 건물이 ‘털렸다.’ 이 부분은 또 어떻게 생각하나.
“박근혜 정부는 제 아무리 옳은 의도일지라도 국민 일부의 항의에 대해서 좀 더 유연한 대처를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특히 파업에 대해서 강하게 대처하면 부작용이 클 수 있다.”
—철도파업을 필두로 의료, 전기 등 ‘민영화’에 대한 논쟁이 분분하다. 때문에 박 대통령을 두고 영국의 대처 전 총리와 비교하는 ‘박 대처리즘’이란 말도 나왔다.
“‘박 대처리즘’…. (민영화가) ‘박’이 ‘대처’하는 방법인가 보다(웃음).”
—‘박근혜 정부가 소통을 안 한다’는 말도 많다. 조언을 해주고 싶다면.
“옳은 의견이건 옳지 못한 의견이건 소통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을 다양하게 써야 한다. 일례로 박 대통령은 창조경제 강조하시는데 그러려면 박 대통령께서 직접 배경이 다른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의견을 듣는 게 중요하다. 현재의 박 대통령은 너무 아는 사람 위주로만 만나는 것 같다. 어떤 기분에선 그 분들이 우수할지 몰라도 덜 우수할지언정 다른 분야의 사람들도 만나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창조적인 생각이 나온다.”
—앞으로 정치에 뛰어들 생각이 있나.
“자리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분간은 동반성장을 위해 매진하겠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
‘안의 생각’ 아리송해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당시 안철수 후보는 정운찬 전 총리의 영입을 적극 시도했다. 안 후보가 공개석상에서 재벌에 대해 각을 세우며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동반성장을 주장했기 때문에 ‘안철수-정운찬 연대’가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계속 제기된 바 있다. 그에 정 전 총리도 “동반성장의 가치에 동의하고 그런 사회를 만들 의지가 있다면 안철수 후보를 도와 줄 수도,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말해 양측간 연대가 가시화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하지만 그 후 연대설은 흐지부지됐다. 안 후보 측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 후보 대선캠프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대선 당시에는 정 전 총리가 이명박 정부 총리를 지낸 것과 세종시 수정안을 주도했다는 점 등 때문에 안 후보가 선뜻 함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고 밝혔다.
안철수 의원이 지난 12월 23일 새정치추진위원회 현판식을 가진 뒤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최근에 안철수 의원을 만났다는데.
“3~4개월 전에 찾아왔다. 한 30~40분 정도 대화했다.”
—안 의원이 뭐라고 하던가.
“국민의 여망을 저버릴 수 없으니 좀 도와달라고 했다.”
—그래서 뭐라 답했나.
“완곡하게 거절한 후 ‘열심히 하시라’며 응원의 말씀을 드렸다.”
—최근 인터뷰에서 ‘안 의원이 사람을 귀하게 여겼으면 좋겠다’고 조언했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덕담에 불과하다. 특별한 배경은 언급하기 어렵다. 안 의원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안철수-정운찬’의 제2의 연대설마저 성사되지 않은 이유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정치권에서는 “안 의원이 애매모호하게 도와달라고 하니 당연히 정 전 총리가 적극 움직이지 않았던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정 전 총리 입장에서도 안 의원의 정책적 정체성이 불분명하고 도와달라고 말은 하지만 그 ‘진실성’이 느껴지지 않아 손사래를 쳤다는 해석도 나온다. 정 전 총리는 지난해 대선 과정 때 ‘안철수의 생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안철수의 생각이란 저서에 대해) 세상에 옳은 얘기는 다 쓰여 있어서 잘 모르겠다”며 정체성의 애매모호함을 지적한 바 있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