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주류 중진인 정몽준 의원(왼쪽)과 이재오 의원이 지난 연말 박근혜 정부의 국정 운영에 대해 쓴소리를 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비주류엔 우선 지난 정권 주류였던 친이계가 포진해 있다. 새누리당 ‘소맹주’ 김무성 의원 라인과 중도파들도 비주류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 또 친박이긴 하지만 ‘홀박(홀대받는 친박)’, ‘잘박(잘린 친박)’으로 불리는 의원들 역시 비주류로 꼽힌다. 이들 비주류를 통틀어 비박계라고 칭한다. 최근 몇 년간 친박과 친이의 대립 구도였던 새누리당 계파 싸움이 이제는 친박과 비박으로 바뀐 형국이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 새누리당 내에서 친박과 비박이 마찰을 빚었던 사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간혹 티격태격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소규모 국지전에 불과했다는 평이다. 이는 당권파인 친박의 파워가 비주류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권대우 정치컨설턴트는 “대통령 집권 1년차는 여당 주류 세력의 힘이 가장 셀 때다. 비주류로서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또 비주류가 허니문 기간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기도 한다”면서 “지난 2008년 총선 공천에서 친이가 친박을 상대로 대학살을 펼쳤던 것처럼 주류가 대놓고 비주류를 공격하지 않는 이상 양측이 크게 다툴 일은 없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나 역대 정권에 비춰봤을 때 대통령 집권 2년차에 접어들면 어김없이 가라앉아 있던 여권 주류와 비주류 간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곤 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지난 연말부터 그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공석인 당협위원장 자리를 놓고 전국 각지에서 친박과 비박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던 것인데, 서울시 강동을 당협위원장 선출을 놓고 불거졌던 잡음이 대표적이다.
지난 12월 13일 친박 핵심 홍문종 사무총장이 이종춘 전 한보그룹 사장을 강동을 당협위원장으로 낙점하려 하자 친이계인 김성태 서울시당위원장이 강하게 반발하며 충돌이 발생했다. 김 위원장은 친 김무성계로 분류되는 인사다. 당시 김 위원장을 비롯한 친이 의원들은 “홍문종 사무총장이 당을 사당화하고 있다”며 반기를 들었다. 그동안 새누리당 내에서 금기시되다시피 했던 ‘사당화’라는 단어가 언급된 것 자체만으로도 비주류의 격앙된 분위기를 짐작케 한다.
정진석 전 의원이 국회 사무총장을 맡으며 공석이 된 서울 중구 당협위원장을 둘러싸고도 친박과 비주류가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 지역엔 나경원 전 의원과 탤런트 심은하 씨의 남편으로 유명한 지상욱 전 자유선진당 대변인이 공모를 신청한 상태다. 새누리당은 지난 연말까지 임명 절차를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아직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당초 비주류 후원을 등에 업은 나 전 의원이 유력했지만 서청원 의원을 비롯한 친박 핵심들이 지 전 대변인을 밀면서 혼전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다.
이에 대해 나 전 의원 측 관계자는 “통상 당협위원장은 전임 위원장이 지명하는 게 관례였다. 정진석 전 의원이 나 전 의원을 밀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그런데 특정 인사들이 여기에 딴죽을 걸어 늦춰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충북도 내 국회의원 선거구 중 최다 유권자가 분포돼 있는 흥덕을을 비롯해 당협위원장 자리가 비어 있는 대부분 지역에서 서울 중구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처럼 주류와 비주류가 당협위원장을 놓고 부딪히고 있는 것은 6월 지방선거 및 전당대회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당협위원장은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를 뽑을 때 선거권을 갖는 대의원을 지명하게 된다. 또 지방선거에서 후보 공천권을 행사할 수 있다. 재·보궐 선거와 총선 때는 스스로 공천 영순위가 되는 자격을 가진다.
이재광 정치컨설턴트는 “중앙당의 웬만한 고위 당직자보다 지역 당협위원장 권한이 더 막강하다고 보면 된다. 특히 선거 때는 당협위원장이 ‘슈퍼 갑’이다. 지난 정권에서도 친박과 친이가 당협위원장을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해 사활을 걸고 싸웠었다”면서 “지방선거와 전당대회가 동시에 치러지는 만큼 당협위원장의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곧 비주류가 그만큼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것으로도 받아들여진다. 6월 지방선거와 전당대회에서 주류에게 밀릴 경우 정치적인 재기가 힘들 것이란 우려를 하고 있다는 얘기다. 친이계의 한 재선 의원이 사석에서 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서울 중구 당협위원장에 나경원 전 의원(왼쪽)과 탤런트 심은하의 남편 지상욱 전 자유선진당 대변인이 공모를 신청했다. 새누리당은 지난 연말까지 임명 절차를 마무리 지으려 했지만 비박과 친박의 힘겨루기로 아직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일요신문 DB
이러한 기류는 지난 연말 비주류 인사들 발언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친이계 좌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재오 의원은 지난해 12월 29일 자신의 트위터에 “지금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눈물이 난다”며 현 정권을 겨냥했다. 정몽준 의원도 ‘2013년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들’이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청와대는 여당을 한 배를 타고 있는 동지라고 인정하고 있느냐”고 꼬집었다.
한때 친박 핵심이었지만 이제는 비주류로 꼽히는 유승민 의원은 철도파업과 관련해 “수서발 KTX 자회사 설립은 잘못된 것”이라며 정부 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해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차기 당권을 노리고 있는 김무성 의원이 지난해 대선 1주년을 맞아 당사에 붙인 이른바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 역시 박근혜 정권을 향해 할 말은 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됐다. 약속이나 한 듯 비주류 중진들이 한 목소리로 쓴소리를 했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은 장면들이다.
특히 몇몇 비주류 초·재선 의원들은 친박 핵심 인사들의 퇴진 요구 움직임을 준비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주류에 빼앗긴 당권을 되찾기 위해선 특단의 카드를 꺼내야 한다는 게 이들의 판단이다. 이는 마치 지난 2008년 6월 정두언 정태근 등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쇄신파 의원들 주도로 대두됐던 ‘권력 사유화 논란’을 떠올리게 한다.
이명박 정부 개국공신이었지만 권력 싸움에서 밀려 비주류로 전락한 정두언 의원 등은 이명박 전 대통령 측근 인사들이 정권을 농단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로 인해 ‘왕비서관’으로 불렸던 박영준 전 차관이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또 그 불똥은 당시 주류인 친이계를 이끌던 이상득 전 의원과 이재오 의원에게로까지 옮겨 붙은 바 있다.
현재 비주류 측이 퇴진을 주장하고 있는 친박 인사들은 대략 5명이다. 우선 당내에선 친박 실세들인 최경환 원내대표,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 홍문종 사무총장이 거론된다. 앞서 언급한 친이계 재선 의원은 “여기서 말하는 퇴진은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2선으로 후퇴하라는 의미”라고 강조했다.
청와대에선 김기춘 비서실장과 이정현 홍보수석이 퇴진 대상자로 꼽혔다. 김무성 라인의 한 의원실 관계자는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 이미지는 김 실장과 이 수석 책임이 가장 크다. 청와대 개편에서 반드시 물러나야 할 인사들”이라고 전했다. 비주류 의원들은 ‘친박 5인방’을 잘못된 당·청 관계를 만든 장본인으로 규정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퇴진을 요구할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그러나 비주류의 이러한 ‘도발’이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선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비주류 면면을 보면 급조된 성격이 강하다. 솔직히 친이와 친박 비주류가 한 배를 탈 수 있겠느냐. 어려움이 닥치면 언제든 와해될 수 있다. 똘똘 뭉친 친박 주류에 비하면 오합지졸에 불과하다”고 깎아내렸다.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이 변수라는 얘기도 나온다. 박 대통령 지지율에 따라 비주류 결집력이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새누리당 싱크탱크 여의도연구원의 한 관계자는 “박 대통령 지지율이 조금 하락 추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50% 중반을 기록하고 있다”면서 “박 대통령 지지율이 공고한 상황에서 비주류가 명분을 확보하긴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