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고감도 이미지센서 상용화 칩’ 개발성과 시연회에서 전자부품연구원 김 아무개 박사가 SMPD를 들어보이고 있다. 이 기술은 가짜로 판명났지만 투입된 국고 92억 원은 환수되지 않을 채 증발했다. 연합뉴스
92억 원이 투입된 해당 기술은 지난 2011년 연구 진실성 조사를 거쳐 가짜임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막대한 돈을 주고 기술을 이전해간 중소기업은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기술 개발에 투입된 예산은 상·하급 국책기관들이 책임을 떠넘기다 결국 예산 환수 조치조차 최종 무산된 희대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업계 관계자 대부분은 <일요신문> 보도에 대해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무엇이 문제일까. 2013년 기준, 국가R&D사업 예산은 총 17조 원 규모다. 부처별 예산 현황을 살펴보면, 미래창조과학부가 5조 5354억 원으로 가장 많고, 산업통상자원부가 3조 1463억 원, 교육부가 1조 5890억 원 순이다. 정부 연간예산이 342조 원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전체 예산의 4.9%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이러한 규모는 해외 유수의 선진국들과 비교해 봐도 결코 뒤지지 않은 수치다. 국가R&D 예산은 2010년 기준 GDP(국내총생산)와 대비해 3.74% 수준이고, 이는 OECD(국제협력개발기구) 회원 국가 중 3위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에 투입되는 연구원 규모도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6위를 기록했다. 이는 지금껏 대한민국이 과학기술 강국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큰 밑거름이 됐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이렇게 겉으로 치장된 포장을 살며시 뜯어내면 여느 공공부문 못지않게 예산 누수가 심각한 곳이 바로 국가R&D사업이다. 국가R&D 예산이 다른 공공부문 예산규모와 비교도 할 수 없는 매머드급이라는 점을 놓고 볼 때 이는 무척이나 심각한 사안이다. 세수확보를 꾀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로서는 어쩌면 가장 먼저 손을 대야 하는 곳일지도 모른다.
겉보기에 국가R&D사업의 성과는 실로 놀랍다. 2013년도 국감에서 이현재 새누리당 의원이 공개한 국내 국가R&D사업의 성공률은 2012년 기준 82.3%에 달했다. 2011년에는 무려 97.3%. 대부분 기술 선진국이 60%를 상회하는 수준에 불과한 것을 감안할 때, 대단히 높은 성공률이라 할 수 있다. 문제가 많다는 국가R&D사업이라는데 이러한 놀라운 수치는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일까.
업계 내부에서는 이러한 놀라운 수치에 대해 한마디로 ‘허수가 끼어도 아주 단단히 끼었다’고 지적한다. ‘무조건 보여주기식 성과 위주’의 과학기술업계 문화 속에서 관대한 기준을 적용해 성공률을 도출했다는 것. 여상규 새누리당 의원이 지난 국감에서 공개한 질의 자료를 토대로 보면, 이에 대한 해답을 유추할 수 있다. 지난 2011년 기준으로 국내 공공연구기관이 보유한 기술의 누적 건수는 총 11만 6439건에 달했다. 2010년 8만 7367건에 비해 33.3%나 증가한 수치다.
하지만 실제 이러한 기술이 민간사업으로 전환된 ‘기술이전율’은 처참한 수준이다. 지난 2011년 누적 기술이전율은 24.6%에 불과했다. 국가R&D사업 예산이 투입돼 완성한 공공기술 4건 중 3건은 실제 민간사업에 활용되지도 못한 채 사장된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기술은 또 다른 기술개발에 활용될 여지는 있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심각한 수준이다. 결국 R&D 기술 성공률 82.3%의 상당수는 허수인 셈이고 R&D사업에 투입된 혈세 17조 원 중 상당액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 이진복 새누리당 의원실에서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국가R&D사업 예산으로 도출된 국내 특허기술 중 업계 전문가들이 계산한 평점 80점 이상 받은 우수 특허기술 비율은 2011년 기준으로 전체의 6.2% 수준이다. 국내 민간 R&D사업 기술(10.2%)의 절반 수준이며 해외 R&D기술(28.9%)과 비교하면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막대한 혈세가 투입됐지만, 정작 질적으로 쓸 만한 기술은 극소수라는 얘기다.
이러한 R&D사업의 예산누수는 어떤 식으로 이뤄지는 것일까. 업계의 한 관계자는 “우리 업계에서는 R&D사업예산을 한마디로 ‘눈먼 돈’이라 부른다”며 “상급기관들의 부실한 사업선정 과정은 물론이고, 과정에서 잘못이 드러나도 제대로 된 후속조치가 없다. 게다가 연구기관장들은 임기가 있으니, 신임 기관장들이 취임하면 전임 기관장들의 부실연구에 대해서는 ‘나 몰라라’다. 매년 국감에서 이에 대한 질타가 쏟아져 나오지만, 그때만 참으면 그만이다. 한마디로 알차게 받은 사업예산을 결과가 없다고 상급기관에 환수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이런 식으로 새는 예산만 천문학적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가R&D사업 예산 17조 원 중 매년 약 2조 원을 집행하는 산업기술평가관리원(산기평)의 경우를 보자. 산기평에서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최근 4년간 중단된 R&D과제 예산 규모는 5364억 원이다. 명목은 성실중단, 불성실중단, 부정 및 비리 등 여러 가지 이유지만, 한 가지 비슷한 패턴이 있다. 5년 예정의 과제라 한다면 4년간 예산을 꾸준히 지급받다가 마지막 해에 돌연 과제가 여러 가지 이유로 중단되는 것이다. 결과 도출이 어렵다고 판단하면 조기에 과제를 중단해 예산을 절약할 여지가 있었음에도 꼭 마지막 연도까지 예산을 쓰다 연구과제가 중단된다는 것은 예산을 집행하는 상부기관에서 의심해야 할 대목인 것이다.
앞서 SMPD 사례에서 알 수 있듯, 국책기관의 비리로 인해 예산이 누수되는 경우도 많다. 이진복 의원실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8년에서 2012년 사이 국가R&D예산 집행 과정에서 국책 연구기관의 연구자들이 유용 및 횡령한 사례가 적발된 건수가 183건에 달했다. 물품을 공급하는 데 있어서 값을 부풀리는 사례가 가장 많았고, 연구비 외 목적으로 예산을 유용하거나 참여 연구원의 인건비를 빼돌리는 사례도 있었다. 심지어 아예 배짱 좋게 연구비를 개인계좌로 대놓고 인출하는 경우도 전체의 59건에 달했다.
업계 다른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밝혀진 비리들은 새 발의 피”라며 “더 큰 문제는 비리가 밝혀졌다 하더라도 SMPD의 경우처럼 비리로 날린 연구비 환수 자체도 쉽지 않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거짓임이 판명된 SMPD 기술 시연회장 전경. KBS 뉴스 화면 캡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의지 문제다. 14개 국책 연구기관 소속 연구원들의 평균연봉은 8000만 원 수준이다. 이중 절반은 장관급에 해당하는 1억 2500만 원을 상회한다. 분명 이에 합당한 책임감이 요구되지만, 이들이 속한 연구기관은 예산의 누수 방지, 예산집행 효율성의 극대화 등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가 너무나 부족한 듯하다.
일례로 한 국책기관은 H 대학에 수십억 원대 연구예산을 지원하면서 고가의 장비를 구입케 했지만, 그 연구는 실패로 돌아갔다. 응당 지원한 고가의 장비는 예산 누수 방지 차원에서 회수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부당 집행이 아닌 단순 연구 실패’라는 이유로 해당 장비 소유를 H 대학의 것으로 남겨뒀다. 문제는 예산 낭비를 야기하는 이러한 선심성(?) 장비 기증이 업계에 수두룩하다는 것이다.
업계 내부에서는 지금을 국가R&D사업의 개혁을 해나가는 데 있어서 최적기로 꼽고 있다. 세수 확보, 특히 공공부문 개혁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결연한 의지 때문. 이를 반영이라도 하듯, 최근 국가권익위원회는 새해 벽두부터 31개 부·처·청, 각 부처 출연 전문기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국가R&D사업의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에 대해 과학기술기본법을 비롯해 관련 법령에 대한 부패영양평가 후 개선안 마련 등 각 부처 제도개선에 대해 권고하고 나섰다. 이는 NTIS(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서비스)를 통합포털로 활용해 각 부처 및 전문기관의 연계를 꾀하고 모든 사업정보를 일원화해 관리하는 시스템을 골자로 한다.
세수 블랙홀로 여겨지는 국가R&D사업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대공습은 어떤 식으로 어느 정도까지 이뤄질까. 유심히 지켜볼 대목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국가R&D사업 ‘기술 마피아’ 있다”
<일요신문>은 국가R&D사업의 폐해를 취재하던 중, 익명을 요구한 한 유명 사립대학 공학부 소속 교수를 만날 수 있었다. 기자가 만난 해당 교수는 국내 과학기술계 내부에서도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교수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국가R&D사업의 실상을 한마디로 ‘답이 보이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그 만큼 심각하다는 얘기였다.
―국가R&D사업 업계 내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SMPD 사건이 외부로 불거져 나왔지만 그 사건은 규모로 봤을 때, 문제도 아니다. 그런 사례는 이미 만연하다. 나는 국가R&D사업에 참여하지 않는다. 정부 돈은 더러워서도 안 먹는다는 게 내 신념이다. 국가R&D사업의 폐해는 한마디로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다.”
―문화의 문제?
“그렇다. 국가R&D사업 관리 체계는 ‘과학기술권력’ 아래에 있다. 원자력 마피아와 똑같다. 과학기술권력은 기자나 정치인이나 못 건드린다. 왜? 그 실상에 대해 전문가가 아니면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권력은 과학자를 빙자한 사실상의 정치인들이 국가 권력과 결탁해 좌지우지하는 것이다. 그게 국가R&D사업의 현주소다.”
―자세히 말해 달라.
“상부의 공무원들은 절대 권력을 쥐고 있다. 거기에 결탁한 연구자들은 사실 국내 저명한 실력을 가진 연구자들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실상 여유가 있는 축에 속하는 일부 대학 교수들과 기업 출신의 연구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이 연구를 진행하면 그 과제에는 자문위원들이 꾸려진다. 이 자문위원들은 연구의 문제점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훗날 본인들 연구비 수주를 위해 상부의 공무원들을 위시하는 역할만 충실히 한다. 이들은 절대 상부 공무원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그러한 권력과 업계 내부의 커넥션이 맞아 들어가 진행되는 것이 국내 국가R&D사업의 현실이다.”
―학맥으로 이어진 업계 내부의 실상도 심각한가.
“물론이다. 원자력 마피아 얘기를 하는데, 국가R&D업계도 마찬가지다. 유럽의 경우, 학계가 아닌 학회에서 치열하게 논쟁할 수 있는 장이라도 있지만 국내는 그저 학맥뿐이다. 굳이 특정 대학을 논할 수는 없지만, 서울대를 비롯한 학맥 커넥션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국내 과학기술계는 대학 학부생 때부터 그러한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 하물며 돈이 오가는 업계는 어떻겠나.”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난 솔직히 답이 없다고 본다. 20년 후 한국이 어떻게 될 것 같나. 난 현재의 과학기술권력이 업계를 지배하고 있는 한, 반드시 망한다고 본다. 내 지갑에 있는 돈을 다 걸어도 좋다. 예전에는 국가와 결탁한 특정 세력들의 국가 주도산업이 어느 정도 성과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대는 끝났다. 이제는 열심히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제도의 쇄신이 아니라 문화 쇄신, 권부의 인적쇄신이 없으면 절대 안 된다. 꼭 한 가지 덧붙이자면, 지금처럼 국가R&D사업이 단기간 내 상부의 공무원이 요구는 것처럼 보여주기식 성과를 위해 억지로 진행하는 구조는 없애야 한다. 차라리 보이는 결과를 차치하더라도 기초과학에 기반한 장기 과제 위주로 가는 것이 옳다고 본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