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 안장식이 지난 5일 국립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서 열렸다. 연합뉴스
“사령관님 군인들에게 실탄을 공급하라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야, 그건 절대 안 돼. 실탄 공급하는 순간 참변이야!”
김재춘은 박정희 사령관의 답을 듣고 실탄 공급을 하지 않은 채 출동 명령을 내렸다. 경무대의 말을 어긴 항명인 셈. 김재춘은 이 일로 구속돼 사형 선고만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이승만 대통령이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하야하자 김재춘은 구사일생으로 풀려났다.
4·19가 성공하고 장면 내각이 들어서자 김재춘과 박정희는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술잔을 자주 기울였다. 사실 두 사람의 관계는 오래전부터 끈끈했던 터였다. 김재춘이 육사 5기생으로 입교할 무렵 박정희는 1중대장 겸 전술학 교관을 맡고 있었다. 한마디로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은 셈. 이후 두 사람은 6·25 전쟁에서도 함께 작전을 수행하며 생사고락을 같이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김재춘이 박정희를 도와 5·16 핵심 인물이 된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6관구 참모장이었던 김재춘은 6관구 참모장실을 5·16 핵심 본부로 활용했다.
5·16이 실패로 돌아갈 뻔한 위기 상황을 기회로 바꾼 이도 김재춘이었다. 쿠데타 음모가 새어나가자 군 수뇌부는 5·16 주도 장교들을 체포하기 위해 헌병대를 6관구 사령부로 급파했다. 하지만 김재춘은 헌병 병력을 이끌고 온 헌병차감 이광선 대령을 설득해 5·16 지지로 입장을 돌려놓았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과 서종철 6관구 사령관으로부터 “쿠데타를 저지하기 위해 부대를 잘 장악하라”는 명령도 김재춘은 듣지 않았다.
쿠데타가 성공으로 돌아가자 김재춘이 권력 핵심으로 부상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방첩부대장 겸 군검경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김재춘은 당시 ‘2인자’로 불리던 김종필 초대 중앙정보부장의 강력한 라이벌로 꼽혔다. 당시 육사 5기의 선두주자였던 김재춘과 육사 8기 김종필은 쿠데타 성공 뒤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권력투쟁을 벌였다. 김재춘 장군과 35년 동안 인연을 맺었다는 이연현 5·16 민족상 사무처장은 “당시 중앙정보부는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힘이 없었다. 오히려 김재춘 장군이 실질적인 권력 핵심이라고 봐도 된다. 후에 김재춘 장군이 중앙정보부장을 맡으면서 합동수사본부장의 권한도 가져가게 되는데 실로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이었다”고 전했다.
김재춘과 김종필의 대립은 ‘민정이양’과 ‘군정연장’의 견해차로도 극명하게 나타나게 된다. 김재춘이 “쿠데타 조항대로 2년간의 군정을 마치고 민정이양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김종필은 “사회적 안정을 위해 군정을 계속 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 이는 곧 육사 5기 김재춘 대 김종필이 주축이 된 육사 8기생들의 대립이기도 했다. 김종필과 육사 8기생은 군정연장을 주장하며 결국 공화당 창설 준비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창당 자금이 부족했던 이들은 4대 의혹 사건(주가조작으로 인한 증권파동, 일본 파친코 허가로 인한 커미션 수수, 일본 새나라 자동차 수입 허가 후 커미션 수수, 워커힐 호텔 건설 이권 개입)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남으로써 김종필은 정계를 은퇴, 해외로 떠나게 되고 육사 8기생들은 대거 구속되기에 이른다. 쿠데타 세력 간의 권력 다툼에서 육사 5기 출신이 우위를 점한 셈이다.
하지만 김재춘이 3대 중앙정보부장에 들어서자 육사 8기생들은 김재춘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기 시작했다. 육사 8기생들은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생들이 이권에 개입한 8기생들을 몰아내려 공모한 1963년 ‘7·6 친위쿠데타’ 배후에 김재춘이 있다고 의혹을 제기하면서 김재춘을 끊임없이 흔들었다. 결국 김재춘은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5개월 만에 내려놓게 된다. 이연현 사무처장은 “김재춘 장군은 7·6 쿠데타와 관계가 있지 않았다. 당시 이를 공모한 노태우가 김재춘 장군을 개인적으로 찾아와서 ‘7·6 쿠데타를 지지해 달라’고 얘기하자 김재춘 장군이 ‘5·16이면 됐지 어디서 쿠데타냐’고 혼을 내고 돌려보낸 일화가 있다”라고 전했다.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내려놓은 김재춘은 이전부터 준비해온 자유민주당을 창당하며 최고위원 자리에 오르게 된다. 자유민주당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지시로 민정이양을 위해 ‘범 국민정당’을 표방하며 만든 정당이었다. 하지만 창당이 완료되자 박정희 의장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박정희 의장은 “합류해서 같이 가자”는 김재춘의 요청을 뒤로하고 결국 군정연장을 내포한 공화당을 선택하며 김종필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김재춘과 박정희의 갈림길이 사실상 시작된 것이다.
김재춘은 이후 권력 외곽으로 밀려났다. 1965년에는 당대 최대 이슈인 한일협정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반대 입장을 펴다 결국 투옥되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그다지 서운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연현 사무처장은 “올바른 말을 하다 투옥된 것일 뿐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원망은 없었다. 그만큼 성격이 확고하기도 털털하기도 했다”라고 회상했다.
한동안 정계를 떠나 있던 그는 1971년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정계에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화려한 복귀’는 아니었다. 권력 핵심들의 견제로 공천을 받기까지의 과정도 쉽지가 않았던 것. 8대, 9대 국회의원을 지낸 그는 1987년 대선 당시 ‘군정 종식’을 주장하며 YS 진영에 합류하기도 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공천 문제로 결별을 하게 된다. 이후 정계를 떠난 그는 최근까지 5·16 민족상 이사장 등 5·16을 알리기 위한 활동을 이어갔다.
“5·16이 쿠데타요, 혁명이오?”
“5·16은 쿠데타지 이 사람아”
수차례 받는 5·16에 대한 질문에 대해 김재춘은 “5·16은 쿠데타”라고 늘 주저 없이 얘기했다고 한다. 당황하는 질문자에게 김재춘은 “5·16 이후 공약대로 민정이양만 제대로 됐다면 5·16은 제대로 된 혁명이 됐을 것”이라고 추가 설명을 이어갔다. 평소 고인의 이야기를 귀에 박히도록 들었다는 이연현 사무처장은 “군정연장 쪽으로 입장만 돌렸다면 권력 핵심에서 두고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며 “그만큼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자기주장이 뚜렷하고 할 말은 하는 인물이었다”고 전했다. 5·16 핵심 주역이면서 자기 나름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김재춘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평가는 이제 후세에 남겨지게 됐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