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에서 승승장구하던 박 의원에게 ‘국민의 정부’ 시절 청와대 법무비서관(지금의 인사+민정+개혁사정을 총괄) 발탁은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다. 당시 박 의원은 법무비서관 직을 고사했지만 고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거듭된 요청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박 의원은 험난한 정치 역정을 겪게 된다.
박 의원은 자서전 <정의>에서 “퇴임 후 DJ가 ‘검찰에 있었으면 총장이 됐었을 것’이라며 미안한 감정을 내비쳤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박 의원은 지난 1999년 청와대 법무비서관 재직시절 실체도 없는 옷 로비 의혹 사건에 휘말리며 첫 번째 구속된 데 이어 2000년 나라종금 사건, 2004년 현대건설 비자금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구속됐다. 그러나 박 의원은 세 차례 재판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아 ‘오뚝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박 의원은 모두 336일간 수감됐고, 특히 세 번째 구속 당시인 2004년 현대건설 비자금 사건 때는 심장 관상동맥이 네 군데나 막혀 대수술을 받기도 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봉하마을로 찾아간 박 의원에게 “민주당과 박 의원을 분리해서 생각했어야 했는데 미안하게 됐다”고 사과했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지난 2000년 정계에 입문한 박 의원은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전남 보성·화순에서 당선됐다. 2004년 17대 때는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지만 헌정사상 최초로 옥중 연설을 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2006년엔 민주당 후보로 서울시장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 후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통합민주당 후보로 광주 동구에서 전국 최고 득표율(88.7%)로 당선되면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리고 박 의원은 2012년 7월 19대 총선 당시 선거법 위반 혐의로 또 다시 구속됐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이제 박 의원의 정치생명은 끝났다는 얘기가 파다했다. 실제로 재판부는 1심에서 박 의원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고, 국회는 박 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을 가결시켰다. 항소심을 맡은 광주고법도 7월 17일 박 의원에 대한 심문절차를 진행한 뒤 법정 구속했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박 의원은 벌금 80만 원을 선고받으며 석방됐고, 의원직을 유지하게 됐다. 이른바 ‘동장 투신자살 사건’과 관련해선 무죄를 받았다. 네 번째 구속됐지만 정치적으로 기사회생한 것이다.
‘오뚝이’에서 ‘불사조’로 별명이 바뀐 것도 이 때부터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