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시댁과 거의 남처럼 살면서도 시댁을 부담스러워하는 시대다. 반면 육아나 가사 때문에 친정과는 아주 가까이 지내는 집이 많다. 아들보다는 딸을 기대하고, 딸을 부러워하는 시대, 결혼을 안 해도 문제될 것이 없는 시대, 내가 어렸을 적엔 꿈도 꾸지 못했던 시대가 온 것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어떻게 될까? 비혼이 점점 더 많아지고, 기존의 가족은 점점 더 빠르게 해체되면서 새로운 유형의 가족 형태들이 자리 잡게 되지 않을까. 벌써 강아지를 가족으로 여기는 가족은 많아졌다.
한때 막강한 힘을 발휘했던 가치들이 몰락하고 붕괴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기대 살고 있는 오늘의 소소한 가치들도 내일까지 우리 삶을 든든히 지지해주는 가치가 될 것이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가치들이 변한다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변하는 가치를 빠르게 흡수하는 젊은 세대와 나이든 세대 간의 차이가 사회 갈등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노사정위원회가 지난 1월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 사회갈등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세대차이와 양극화였다. 지역감정보다도 더 큰 문제들이란다.
최근에 오래된 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읽었다.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은 허무주의가 일파만파로 번져가던 19세기 러시아적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면서 허무주의적 태도의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제목이 암시하듯 세대 간의 갈등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그 갈등의 중심에 바로 허무주의가 있고, 주인공 바자로프는 스스로 니힐리스트임을 천명하며 아버지 세대의 공공의 적이 되고 있다.
아버지 세대에게 니힐리스트는 문명이 이룩해놓은 사회적 권위와 질서를 존중하지 않고 파괴하는 인물들이다. 전통적 질서 내에서 살아온 그들에게 니힐리스트는 그들의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권위를 인정하지도, 존중하지도 않는 건방지고도 위험한 인물이고, 그렇기 때문에 허무주의는 공허하고 천박한 병적 태도다.
반면 아들 세대의 허무주의는 기성세대가 그토록 지키고자 하는 가치가 실은 허무한 것임을 폭로하기 위한 논리요 태도였다. 아들 세대에게 기성세대의 도덕이나 문화적 양태는 거대한 편견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허무주의는 우울한 허무주의가 아니라 거대한 허위의식에 대해 ‘허무’를 선포하는 힘 있는 태도다. “왜 제가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까?” 주인공 바자로프의 말에서 자꾸 이 시대의 당찬 젊은이들이 겹쳐진다.
어쩔 수 없다. 우리 삶에는 분명 전면전을 해야 하는 시기, 즉 사자의 시기가 있다. 기존의 삶의 양태를 부정하면서 자기를 세우는 시대, 투르게네프를 읽으며 나는 20~30대의 부정과 저항이 그들의 특권임을, 자기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통과의례임을 확인한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