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2시간여 쪽잠을 자면서 수억 원의 빚을 갚아 사회적 귀감이 됐던 이종룡 씨가 최근 별세한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은 이 씨의 MBC 출연 당시 모습.
<일요신문>은 이 씨가 책을 출간한 출판사에 아들의 연락처를 수소문했지만 신분공개를 꺼린 아들은 출판사 관계자에게 아버지의 사망소식만 전했을 뿐 정확한 사망시기와 경위 등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고 한다. 또한 취재진은 과거 이 씨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여러 곳들도 수소문했으나 2012년 이후 그를 본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소식만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 씨를 학원차량 운전사로 고용했던 한 태권도장 관계자는 “사망 소식은 듣지 못했으나 2012년 그를 본 게 마지막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이 씨는 1960년 전라북도 군산 출신으로 9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전주시 효자동에 위치한 시계도매점의 사장이었다. 잘나갈 땐 월 매출이 3000만 원에 육박할 정도였다. 명품으로 온 몸을 휘감고 다니며 돈을 흥청망청 쓰며 생활했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갑작스레 IMF 외환위기가 닥치자 사업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거래처가 하나둘씩 끊겼고 곧이어 매출이 곤두박질쳤다. 그러면서 1억 원의 대출로 시작한 그의 사업 빚은 천정부지로 늘어났다. 게다가 막연한 기대감에 빨리 사업을 접지 못하고 어영부영 시간을 끌다가 빚은 결국 3억 5000만 원으로 불어났다.
SBS <궁금한 이야기Y> 출연 당시 모습.
이후 이 씨는 돈을 갚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떡 배달, 학원차량 운전, 목욕탕 청소 등 온갖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 씨는 2009년 대우자동차가 경영난으로 떡 배달 계약을 해지했을 때도 그는 곧바로 다른 아르바이트로 대체하는 등 절대 쉬는 법이 없었다.
또한 이 씨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신문 배달하러 가는 30초 남짓한 엘리베이터 안에서는 신문 헤드라인을 읽으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익혔다. 차가 신호에 걸릴 때면 <좋은 생각> 같은 작은 책을 틈틈이 읽기도 했다. 예상보다 아르바이트가 30분 정도 빨리 끝날 때면 폐휴지를 줍는 부지런함도 보였다. 이렇게 그가 하루에 일하는 시간은 총 20시간으로 이동하는 거리만도 약 400㎞에 달했다.
열심히 일한 만큼 대가도 생겼다. 한 달을 기준으로 신문 배달 70만 원, 목욕탕 청소 60만~80만 원, 학원차 운전 70만~80만 원, 떡 배달 150만~180만 원. 여기에 신문 판촉 수당 및 폐지 판돈을 합치면 450만 원 정도 생겼고 350만 원을 뚝 떼어내 10년 동안 빚을 갚는 데 사용했다. 원금과 이자를 갚는데 거의 모든 돈을 쏟아 부은 셈인데 2008년 10월 마침내 그는 빚을 모두 청산했다. 하지만 이 씨는 빚을 갚고도 돈을 쉽게 생각했던 과거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계속 아르바이트를 했고 2009년 이러한 사연을 담아 <3억 5000만 원의 전쟁>을 출판하고 여러 방송에 출연하면서 유명세를 탔다.
그는 새벽에 신문배달과 저녁 목욕탕 청소를 하고 한 달에 150만 원 남짓 벌었다. 하지만 조금이나마 수입이 생기자 그의 나쁜 버릇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바로 음주와 도박이었다. 점점 집에 술에 취한 채로 들어가는 일이 빈번해지고 한번은 이틀 밤을 화투장을 들고 새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들어간 그는 컴컴한 거실에서 흐느껴 우는 부인을 발견했다. 집에 전기와 가스가 나간 것이었다.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이 고생하고 있다고 깨달은 그는 펜치를 가져와 송곳니 두 개를 뽑으며 열심히 살겠다고 의지를 다졌다.
그때부터 그는 아르바이트도 ‘직장’이라는 생각으로 일을 했다. 혹여나 나쁜 습관들이 다시 도질까 아르바이트 개수를 늘려서 몸이 쉴 틈을 주지 않았다. 한 달 용돈도 2만 원 남짓이었다. 하루로 계산하면 약 700원꼴이다. 이렇게 이 씨는 잡생각 없이 혹독하게 일만 했다. 그렇게 ‘알바왕’ 이종룡 씨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어렵사리 되찾은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빚을 다 갚던 날 이 씨는 “아내와 함께 살 수 있는 전셋집을 마련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지만 고된 아르바이트의 후유증으로 그 작은 소망마저 이루지 못한 채 결국 가족 곁을 떠나고 말았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강기준 인턴기자
‘끼니 제대로 안챙겨 탈났을 것’
전문의들에 따르면 대장암은 식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질병으로 과도한 동물성 지방 음식 섭취나 섬유질, 칼슘, 비타민D 등이 부족할 때 발병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병이다. 만약 이 씨의 사망원인이 대장암이었다면 지난 10년간 혹독한 근로로 인해 식사시간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고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던 것이 직접적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
이 씨가 출간한 책 <3억 5000만 원의 전쟁>에 따르면 그는 아르바이트 시작 이후 처음 몇 년은 쏟아지는 잠을 억제하기 위해 저녁밥도 굶었다. 포만감에 쏟아지는 잠을 이겨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하루 스케줄에는 식사시간이 따로 없었다. 늘 굶거나 급한 대로 밥을 물에 말아서 대충 먹었다. 식사를 하느라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것보다 굶더라도 시간을 지키는 것을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직장에서 공짜로 주는 커피를 몇 잔씩 들이키며 빈속을 채우거나, 심지어는 다음 아르바이트를 하러 이동하는 동안 뛰면서 컵라면을 먹기도 했었다.
또한 이 씨는 빚을 전부 청산한 2008년 전까지는 주민등록번호가 말소된 상태라 아파도 병원에 갈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아마도 이런 과정에서 정상적인 식사는 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것이 곧 대장암으로 발전됐을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 [강]
“빚이 날 강하게 해… 포기는 없었다”
그가 남긴 책 <3억 5000만 원의 전쟁>을 보면 이 씨는 자신의 이야기를 덤덤히 전하며 지금의 자신을 만든 것은 ‘빚’ 덕분(?)이었다고 밝혔다. 이 씨는 “빚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런 변화는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아르바이트를 통해 배운 것 역시 많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고 시간을 아낀다면 해내지 못할 일이 없다”며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내가 3억 5000만 원의 빚을 갚을 수 있었던 비결도 몸과 시간을 활용했던 부분”이라고 말했다.
책의 에필로그에서조차 그는 자신이 하나의 희망이 되길 바랐다. 이 씨는 “절망과 고통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절망과 고통에 쓰러지지 않는다면 기회는 반드시 있다”며 “절망은 외부적인 상황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스스로 만든 절망의 벽에 갇혀 있으면 그 벽은 점점 두꺼워져서 결국 두 번 다시 빠져 나올 수 없게 되어버린다. 도전만이 절망의 벽을 허물 수 있는 최고의 무기”라고 조언했다.
또한 이 씨는 자신을 사례로 들며 “가끔은 열쇠 꾸러미의 마지막 열쇠가 자물쇠를 여는 경우도 있다. 그 열쇠를 발견하기까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헤매는 하루하루가 곧 인생이 아니던가. 그곳에서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인생의 과정이라는 것을 나는 실패 후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며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마지막까지 희망을 전하려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