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지방경찰청 경제범죄수사대가 2월 11일 인천시 부평구 청천동에 있는 KT ENS 협력업체 사무실을 압수수색한 뒤 증거물을 차량에 싣고 있다. 연합뉴스
N사 대표 전 씨가 KT ENS의 직원과 공모해 불법 사기 대출을 받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때부터 전 씨는 지난해까지 5년 동안 100여 차례에 걸쳐 16개의 은행으로부터 3000억 원대 거액을 빌렸다. 외상매출채권 담보대출이라는 제도를 통해서다.
이 제도는 물건을 납품하는 업체가 구매사로부터 채권을 받은 뒤 이를 담보로 대출을 받는 방식이다. 채권 기간이 만료되면 구매사는 납품업체가 빌린 돈을 은행에 대신 상환해야 한다. 은행들이 N 사 등에 별다른 의심 없이 거액을 대출해줬던 이유는 대기업 KT의 자회사가 발행한 채권이었기 때문이었다.
전 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N 사를 포함한 여덟 개의 KT ENS 협력업체 대표들과 짜고 물건을 납품한 것처럼 꾸민 위조 매출채권을 만들어 불법으로 돈을 빌렸다. 전 씨 등은 한 곳에서 대출이 만기가 되면 다른 업체를 통해 대출받아 상환하는, 이른바 ‘돌려막기’를 해 연체를 피해갔다.
물론 이 모든 과정을 진두지휘한 것은 전 씨와 KT ENS 협력업체 중 한 곳인 J 사 대표 서 아무개 씨였다. 다른 여섯 명의 대표들은 불법 대출을 도와주는 대신 수억 원의 수수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 씨와 서 씨가 공동으로 주연을 맡았고, 나머지는 조연이었던 셈이다.
금융권은 발칵 뒤집혔다. 우선 사기 대출로 인한 피해 규모에서 역대 최고액이다. 은행들도 피해자였지만 5년 동안 범행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지적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몇몇 은행들이 전 씨가 제시한 매출채권을 수상히 여겨 추가 자료를 요구해 이번 사건의 불똥에서 피해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 시중은행장은 “사기 수법이 아무리 교묘하다 했더라도 피해 은행들이 대출 심사를 꼼꼼히 했더라면 이 정도로까지 확대되진 않았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금융당국 역시 감독소홀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일각에선 법적인 면은 차치하고서라도 KT그룹도 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KT 측은 이 사건에 대해 “자회사 직원의 일탈”이라는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수사기관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검찰과 경찰은 각각 팀을 꾸려 진상 규명에 나섰다. 우선 불법대출에 가담한 KT ENS 직원이 구속됐고, 이어 협력업체 대표들도 줄줄이 체포됐다. 지난 18일엔 핵심 피의자 서 씨도 검거됐다. 수사팀은 이들을 통해 정확한 피해규모 및 돈의 사용처 등을 추궁하는 한편, 달아난 전 씨를 추적하는 데에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2월 초 홍콩으로 출국한 전 씨는 자신의 행적이 노출되자 뉴질랜드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경찰은 인터폴 사무국에 전 씨의 적색수배를 요청해놓은 상태다. 통상 적색수배는 살인, 강도, 성폭행 등 강력범죄를 저지른 피의자나 조직폭력배 간부급에 대해 내린다. 경제사범의 경우 50억 원 이상 피해액을 발생시킨 피의자에게 적용된다.
검·경이 전 씨 체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유는 수사 과정에서 그가 불법 대출을 주도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조사를 받은 협력업체 대표들이나 KT ENS 직원 모두 이번 사건의 주범으로 전 씨를 지목하고 있다”면서 “전 씨와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서 씨조차도 ‘전 씨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귀띔했다.
전 씨와 서 씨 관계를 잘 알고 있다는 KT ENS 협력업체의 한 임원도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평소 서 씨가 전 씨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실제로도 전 씨가 서 씨보다 두 살 위인 것으로 안다”며 “언뜻 보기엔 서 씨가 전 씨의 비서 정도 되는 것 같았다. 불법 대출의 자세한 전모는 전 씨만이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 씨는 수년 전부터 강남 일대에선 유명 인사였다고 한다. 청담동과 신사동 인근 고급 술집 관계자들은 전 씨를 ‘고급 스포츠카를 자주 바꿔 타고 다니는 재벌 3세’로 기억했다. 몇몇은 전 씨를 의사로 알고 있기도 했다. 멤버십으로 운영되는 속칭 ‘텐카페’의 한 사장은 “(강남 고급 유흥가에서) 전 씨를 모르면 간첩이다. 씀씀이가 화끈해서 아가씨들이 무척 좋아했던 손님”이라며 “또 수천만 원에 달하는 명품 시계를 그 자리에서 풀어 주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올 때마다 차가 바뀌었는데, 대부분 1억 원이 넘는 것들이었다”고 말했다.
최상위 계층만 출입한다는 ‘텐프로’의 한 마담 역시 “보통 텐프로는 아가씨들이 여러 방을 다니며 회전을 한다. 그러나 전 씨가 오면 아가씨가 딴 방으로 가려 하지 않았다. 아가씨들 사이에서도 전 씨는 ‘로또’로 통했다”면서 “전 씨가 자신을 재벌가 일원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전했다.
특히 전 씨가 화제를 모았던 것은 동행했던 인사들의 면면 때문이었다. 얼굴만 봐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연예인을 비롯해 유명 정치인, 재벌 2·3세들이 전 씨와 함께 나타났던 것이다. 한번은 소녀 팬들이 많은 아이돌그룹의 한 멤버를 데리고 와 아가씨들의 관심을 받았다고 한다.
앞서의 텐프로 마담은 “전 씨가 대화하는 것을 들어보면 은행이나 투자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 씨가 증권사의 높은 분이라며 잘 모셔야 한다고 직접 말한 적도 있다. 그런데 솔직히 그들은 우리가 봐도 누군지 잘 모른다”며 “그런데 전 씨가 뉴스에서나 봤던 사람들을 데리고 오기도 했다. 정치인과 재벌가 자제들이었다. 간혹 검찰 수사관이나 경찰도 같이 왔다. 계산은 항상 전 씨가 했다”고 떠올렸다. 이는 전 씨가 금융권은 물론이고 정·재계, 사정기관 관계자들까지도 폭넓게 친분을 쌓아왔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일요신문>이 전 씨의 과거 호화 생활에 주목한 것은 사기 행각과 상당 부분 관련이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우선 전 씨가 강남 유흥가에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때는 지난 2009년 후반부터다. 또 전 씨가 활동했던 인터넷 동호회에서 유명세를 떨쳤던 것도 이 무렵이다. 2008년부터 불법 대출을 했던 전 씨가 여기에서 마련한 돈 중 일부를 흥청망청 썼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는 대목이다.
전 씨는 자신의 범행에 공모했던 서 씨나 다른 협력업체 대표들에게도 고급 시계나 수입차를 사주는 등 ‘통 큰 선물’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수사팀은 전 씨가 대출을 통해 받은 돈의 대부분을 이처럼 개인적인 용도로 썼을 것으로 보고 있다.
전 씨와 고급 술집에 드나들었던 인사들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들이 전 씨 범행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을 가능성 때문인데, 이 경우 불법 대출 사건은 대형 게이트로 번질 수 있다. 벌써부터 금융권 안팎에선 전 씨 ‘인맥’들이 불법 대출을 도와줬거나 최소한 방조했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이는 전 씨가 5년에 걸쳐 사기를 벌여왔는데도 은행이나 금융당국이 전혀 몰랐다는 부분과 맞닿아 있다.
더군다나 감사원은 2012년 전 씨가 사기에 동원한 매출채권 위조 가능성의 위험을 제기하면서 ‘협력업체의 도덕적 해이’를 신경써야 한다고 주문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융당국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은행이나 금융권에 전 씨와 ‘내통’한 공모자나 조력자가 있을 것이란 얘기가 나오는 배경이다. 또 전 씨가 사전에 해외로 도피한 것을 두고서도 평소 전 씨가 관리했던 사정기관 인사들이 도움을 준 것 아니냐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
시계 7개 값이 3억 ‘훌쩍’
불법 대출을 통해 거액을 손에 쥐게 된 전 씨는 한 시계 동호회에서 ‘전설’로 통한다. 2009년부터 2013년 사이 전 씨는 이 동호회 홈페이지에 자신이 갖고 있는 시계들 사진을 올리며 시선을 모았다. 전 씨가 게재했던 시계 대부분은 개당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것들이었다. 전 씨가 올렸던 사진 중엔 시계 일곱 개를 모아놓은 것이 있는데, 그 가격을 모두 합하면 3억 원이 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전 씨가 시계 7개를 모아 찍은 사진을 시계동호회 홈페이지에 올렸다. 현재 이 사진은 삭제된 상태다.
전 씨는 시계뿐 아니라 한 자동차 동호회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하며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전 씨는 한 수입차 이름을 빗댄 닉네임으로 활동하며 보유 자동차 사진을 올리며 부를 과시했다. 1억 원짜리는 기본이었고 대부분이 2억~3억 원대 메이커였다. 이 동호회 게시판엔 전 씨가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 차의 목격담이 여러 번 올라오기도 했다. 전 씨는 시계와 마찬가지로 자동차도 지인들에게 선물을 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흥미로운 점은 전 씨가 지난 연말 시계 동호회의 연말 송년회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아마 전 씨는 자신이 두 달 후 해외로 도피하게 되는 신세가 될 것은 전혀 몰랐을 듯하다. 전 씨는 이 자리에서 회원들에게 고급 휴대폰 케이스를 선물로 했다고 한다. 당시 참석했던 한 회원은 게시판에 “○○ 형(전 씨)이 화끈하게 쏘고 갔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전 씨 소식이 알려진 후 시계 및 자동차 동호회에서는 “돈 펑펑 쓰더니 그럴 줄 알았다”, “재벌가라더니 사기꾼이었다”는 식의 반응이 주를 이루고 있다. 현재 해당 동호회 게시판엔 그동안 전 씨가 올렸던 글은 모두 삭제된 상태다.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