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28·대기업 근무): 다들 어디가도 항상 대접받는 사람들이라 우리끼리만 모여 있으니 오히려 어색하네. 남자라도 불러야 될까봐. 오늘 같은 날 강남이나 이태원에 혼자 앉아있었음 벌써 술 사주겠다는 남자들이 득실댔을 텐데 아우라 넘치는 여자 넷(기자 포함)이 모여 있으니 감히 접근도 못하네. 이래서 남자들이 소심하다는 거야. 그치.
연서(27·스튜어디스): (기센 언니들 사이에서 낯을 가리던 막내 연서 씨도 나름 마음을 먹었는지 화제를 전환하려 애쓰면 한 마디 던진다) 요즘은 다들 어디 나가세요? 겨울이라 스키장 많이 가겠다. 전 겨울보다는 스포츠카 타고 드라이브 할 수 있는 따뜻한 계절이 좋아요.
별 뜻 없이 꺼낸 ‘스포츠카’라는 단어는 순식간에 대화 농도를 ‘19금’으로 끌어올렸다.
하은: 야, 스포츠카 하니까 생각난다. 진짜 찌질하게 생긴 놈 하나가 몇 번 차이니까 갑자기 스포츠카를 타고 오더라? 나도 속물이라고 느낀 게 갑자기 그놈이 현빈으로 보이는 거 있지. 불 끄면 얼굴도 안 보이는데 외모가 무슨 소용이겠어. 자유로 따라서 파주 임진각 근처로 가면 가로등 없는 곳 많은데 못 생긴 남자면 거기로 데려가.
연서: 왜 못 생긴 남자랑 억지로 만나냐. (그녀는 이미 ‘슈퍼카 모임’에 여러번 초대를 받았다며 약간의 자랑을 늘어놨다) 스튜어디스가 되고 선배 중 하나가 ‘올해는 너구나’라며 슈퍼카 모임에 초대해줬어요. 말로만 듣던 재벌가 아들도 많고 여자들도 진짜 예뻐서 놀랐죠. 어릴 땐 저도 비싼 외제차 타고 다니는 게 좋아서 매주 모임에 나갔는데 이제 좀 식상해서 안 가요. (연서 씨는 국내 몇 대 수입되지 않은 페라리, 람보르기니, 포르셰, 마세라티 등 타보지 않은 스포츠카가 없을 정도로 재벌남들의 초대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성형이라는 비밀을 공유하고 나자 대화는 한층 무르익어갔다. 그쯤 기자가 슬쩍 “요샌 어떤 남자를 만나고 다니냐”는 질문을 던졌다.
하은: 나이가 드니까 ‘낮이밤이’에서 ‘낮져밤이’로 갈아타게 되더라. 대기업 다니는 30대 초반 남잔데 확실히 나이가 좀 있어야 여자를 다룰 줄 알아. 그렇다고 늙은이는 안 돼. 힘도 없고 시시하고 끈적거리는 게 딱 질색이야. (하은이 말하는 ‘낮이밤이’란 일상적인 데이트를 하는 낮에도 리더십 있게 여자를 이끌어주고 성관계에서도 박력 있게 이끌어주는 남자 타입을 말한다. 반면 ‘낮져밤이’는 평소엔 여성의 의견대로 따라주고 져주는 부드러운 타입이나 밤에는 여성을 이기고 야수로 돌변하는 남성을 가리킨다고 한다)
유주: 나도 동감. 근데 ‘낮져밤이’인 줄 알았는데 ‘낮져밤져’(데이트나 잠자리나 일방적으로 여자에게 끌려 다니는 타입)인 남자가 은근 많더라. 완전 짜증. 몸만 우락부락해서 자기 약점 숨기려는 남자들도 많고. 덩치와 밤일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헬스장에서 만난 남자로부터 깨달았어. 겉만 멀쩡하고 실속 없는 허접한 것들만 헬스장에 몰려있는 것 같아. 우리 막내는 어떤 타입이 좋을까나?
연서: 임신한 와이프 둔 유부남, 테크닉 없이 힘만 센 애들, 자기 잘했냐고 묻는 아저씨들만 아니면 크게 선호하는 스타일은 없는 것 같아요. 술 마시면 꼭 자기 와이프 얘기하는 남자가 있는데 이건 국내외 막론하고 다 똑같더라고요. 벗겨 놓고 안절부절 못하는 남자들도 있었어요. 너무 예뻐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나. 비밀 하나 고백하자면 제 스폰서가 그래요.
평범한 여성들에게도 스폰서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연서는 의외로 담담했다.
유주: 진짜 예쁜 애들은 잠자리도 안 하고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정기적으로 돈을 받더라. 좀 얄밉기도 한데 내가 봐도 예쁘니까 남자들은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겠지. 뭐, 친구들이 잠자리해주면서도 자존심 세운다고 거짓말 할 수도 있고. 근데 연서야. 스폰서까지 만들면 나중에 진짜 남자친구 만나는데 영향 있지 않을까? 난 지금도 약간 그런 고민이 있거든.
유주가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은 현재 6개월 동안 교제하고 있는 남자친구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연서: 실컷 자유롭게 놀다가 결혼은 부모님이 짝 지어주는 사람이랑 선봐서 할 예정이에요.
유주: 솔직히 놀 만큼 놀았더니 남자에 대한 믿음이 없어. 난 원나잇도 해봤는데 남자친구랑은 여태껏 자지 않았어. 잠자리 가지면 내가 놀았다는 거 들통 날 것 같아 무서운 마음도 있어. 나도 모르게 테크닉이 나온다거나 주체가 안 될 것 같은 느낌….
하은: 엔조이 상대는 맘 주면 돈 안 주고, 몸만 주면 돈이 붙지만 진짜 남자친구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난 남자친구에겐 마음은 주되 몸은 최대한 늦게 주는 게 맞는다고 본다. 근데 이런 고민도 우리가 남들보다는 좀 더 자유를 누린 대가가 아닐까. 한번 쉽게 남자 만나면 진짜 마음 주기 어려운 건 사실이다. 그래서 평범하게 사는 친구들이 부러울 때도 있다. 그런데 주변 언니들 보면 그리 신나게 놀다가도 시집만 잘 가서 애 낳고 잘만 살더라. 너무 걱정하지 마라. 아직 우리 젊다.
연서: 유주 언니는 결혼 진짜 잘할 것 같아요. 사실 어릴 땐 좀 귀엽고 가녀린 스타일이 인기 많아 보였는데 이젠 언니같이 섹시한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가 남자들한테 훨씬 매력적으로 보이는 것 같아요. 여잔 25살 넘으면 진짜 예쁘거나 섹시하거나 두 가지 매력뿐인 거 같거든요. 근데 유주 언니는 진짜 내가 갖고 싶은 섹시한 분위기가 있어요.(웃음)
유주: 그렇지. 30대 넘긴 남자들에겐 나 같은 스타일이 더 인기지. 나올 때 나오고 들어갈 때 들어가고. 색기가 넘치잖아. 푸하하. 키 작아도 볼륨이 있으면 오케이고 아무리 키가 커도 볼륨 없으면 일회용이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손 하나 까딱 안 하고도 먹고 살걸. 회사에도 곁눈질 하는 상사들이 줄이 섰다.
이쯤 돼서 기자는 결정적 의문이 생겼다. 이렇게 잘나가는 여자들이 힘들게 일은 왜 하지? 예쁘다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남자들이 널렸는데 말이다.
유주/하은: (동시에) “넌 그래서 하수야”
연서: 언니, 머리에 든 게 있어야 남자를 요리해. 게다가 나 봐. 스튜어디스라면, 관심 없던 남자들도 되돌아봐. 있어 보이잖아. 또 직업이 있어야 시장에서 팔려. 시집 잘 가려면 그때까진 더러워도 참고 다녀야 해.
그렇게 웃고 떠들며 어느덧 2시간이 지나고 각자 내일을 위해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 때쯤, 오래 전부터 ‘처녀들’에게 뜨거운 눈길을 던지던 옆자리 남자 3명 가운데 한 명이 천천히 그녀들 테이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