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활 4년 내내 과외 아르바이트로 매달 수십만원씩 벌어 빚 갚는데 썼지만 그 돈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신용불량자가 되는 바람에 대기업 취직과 유학도 포기하고 얼마 전 조그만 회사에 겨우 취직했다. 1백50만원 받는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빚 갚는 데 다 쓴다 해도 2년이 넘게 걸린다. 그 사이 또 이자는 얼마나 불어나겠는가.”
윤씨는 이자 부담이 워낙 커 원금만이라도 갚게 해줄 방법이 없는지 백방으로 알아봤지만 헛수고였다. “매달 20% 안팎의 이자만 없다해도 어떻게 해보겠는데, 지금으로선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 돈 벌어서 빚 갚다 내 인생이 끝날 것 같다.”
▲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IMF 이후 급격히 늘어난 카드빚 연체자는 그동안 빚에 쫓기고 채권추심기관의 채무상환 압박에 시달리느라 몸과 마음이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최근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 나오는 온갖 흉악범죄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카드빚 대란’의 심각성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최근 강남 일대를 극도의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은 떼강도 납치사건에서 ‘6인조 납치 전문조직’의 전모가 드러나자 사람들은 경악했다. 20~30대 여성을 무차별 납치해 집단 성폭행하고 신용카드 등 금품을 갈취해오다 체포된 주범들은 경찰 조사 결과 적게는 2천만원에서 많게는 4천만원까지 카드빚을 진 것으로 드러났다.
강남경찰서 형사계 조사에 따르면 주범 중 한 명인 서아무개씨(27)는 경륜 등 도박에 빠져 안게 된 카드빚과 사채를 신용카드 4장으로 돌려 막다 4천만원의 빚을 지고 범죄에 빠져들었다.
지난 6월 채무자의 초등생 두 아들을 납치한 뒤 “돈을 갚지 않으면 아이들의 장기를 팔겠다”고 협박하다 경찰에 붙잡힌 송아무개씨(28) 형제는 그동안 5천여만원에 달하는 카드빚에 시달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빚에 쫓기자 이아무개씨(37)를 상대로 빌려준 2천만원을 받아내려 범행을 저질렀다. 서울 용산경찰서 강력반 담당형사에 따르면 “IMF 이후 아버지 사업이 어려워져 이를 도와주려고 두 형제가 카드빚을 냈다 갚지 못했다. 그 와중에 이씨가 빌려간 돈을 갚지 않자 아이들을 납치했다”고 한다.
경찰청에 따르면 살인·강도·절도·강간·폭력 등 5대 강력범죄 발생건수는 지난 1월 3만3천여 건에서 5월에는 4만4천여 건으로 34%가 늘었다. 6월 중순까지 발생한 납치·유괴사건만 12건에 달했다. 뿐만 아니라 초범자들에 의한 강·절도 범죄의 90%가 카드빚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경찰청은 최근 납치·인질강도, 인신매매, 갈취 폭력, 사채 폭력, 강·절도 등 민생 침해사범에 대해 ‘강력범죄 소탕 1백 일 작전’에 돌입했다. 또 각 지방청별로 인질·납치 수사에 경험이 많은 형사들을 중심으로 ‘인질 납치전담 수사반’을 편성해 적극 대응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선 “범죄 소탕작전만으로 카드빚 문제가 해결될지 의문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왜 빚을 지고 궁지에 몰리게 됐는지 원인을 분석하고 법적·제도적으로 이들을 구제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신용불량자 구제 문제에 앞장서온 신용사회구현시민연대(www.credit815.org) 석승억 대표는 “신용불량자가 되면 취업 시 보증보험 가입이 불가능해 취업이 쉽지 않다.
설사 취업 상태에 있더라도 채권추심기관의 괴롭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이 많다. 빚을 갚으려면 채무자가 돈을 벌 수 있어야 하는데 사회적으로 그 통로를 막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많은 채무자들이 돈을 벌 수 없는 상태에서 변제 압박이 오면 죽고 싶은 심정이 된다. 결국 ‘내가 죽게 생겼는데 못할 게 뭐가 있냐?’하는 자포자기 심정이 되고 이것이 강력범죄의 불씨가 되고 있다. 피스톤 구멍을 막은 상태에서 펌프질을 하면 결국 폭발하게 되는데 지금 우리사회는 법적, 제도적, 사회적 분위기로 신용불량자를 그렇게 몰아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대다수 채무자가 카드빚에 쫓겨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된 상황을 살펴보면 일정한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한결같이 ‘대출 또는 현금서비스→신용카드 돌려막기→사채를 통한 카드깡 또는 카드대납→신용불량자’의 수순을 밟고 있는 것이다.
지난 3월 <늬들이 카드빚을 갚어?>(법률정보센터 출간)라는 책을 통해 우리사회 ‘카드빚 대란’의 실체와 문제점을 제기한 김관기 변호사는 “재작년부터 파산 등 신용불량자의 법적 구제에 대해 문의해오는 사람들이 급증했다”고 밝혔다. 그가 상담한 신용불량자 사례를 보면 한결같이 ‘돌고 도는 빚의 악순환 고리’가 쉽게 발견된다.
“옷장사를 하기 위해 2천여만원의 자금을 카드론, 카드대출, 현금서비스로 충당했다. 그런데 이자율이 장난이 아니라 1년 사이 빚이 5천만원이 넘게 되었다. 너무 힘들어서 사채업자에게 카드대납을 하나 시킨 후 어쩔 수 없이 카드깡도 하게 됐다. 1년 사이 신용카드도 5개를 더 만들었는데, 사실 이건 사채업자들이 주선해 만든 것이다. 그동안 이렇게 해서라도 계속 이자만 갚아왔는데 이젠 빚이 계산도 못할 정도가 되었다.”
김 변호사는 “예를 들어 이자율을 10%로 계산해서 5백만원을 빌린 사람이 있다 치자. 일년이 지나면 원금과 이자, 이자에 이자가 붙어 갚아야할 돈은 1천5백만원을 훌쩍 넘긴다. 채무가 누진적으로 체증하는 복리계산이 적용되는 현 금융시스템에서 빠르게 불어나는 이자와 원금을 월급만으로 감당하기 쉽지 않다. 그 때문에 돌려막기 유혹에 빠지는데 그럴 바엔 차라리 파산선고를 하는 게 낫다.
현재 우리사회에서 채무에 허덕이는 사람이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어느 날 갑자기 떼부자가 되는 길밖에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채무자가 근로의욕을 상실하거나 자살하면 나라가 걷을 수 있는 세금이 줄어들고 이건 또 다른 사회적 손실이다. 채무자를 빚에서 헤어날 수 있도록 숨통을 틔워주는 방법을 시급히 강구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대출 또는 카드빚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들은 한결같이 호소한다. “빚 떼먹었단 소릴 평생 들으며 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다. 하루라도 빨리 채무에서 벗어나 다리 뻗고 자고 싶다. 1년이 됐든 10년이 됐든 빚을 갚을 수 있는 시간만이라도 줬으면 좋겠다. 열심히 일해서 빚을 갚을 수 있는 일자리도 정말 필요하다.”
박은경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