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지법 판사 시절이던 지난 88년 강금실 장관(오른쪽)의 부산 자택에서 전통무 교습중 김수악 선생과 함께. | ||
전통 진주검무와 교방굿거리춤의 명인 인간문화재 김수악 선생은 강금실 장관에 대한 자신의 기억을 이렇게 회고했다.
올해 우리 나이로 꼭 여든을 채운 인간문화재 김수악 선생(본명 김순녀). 한국 국악계의 얼마 남지 않은 명인 가운데 한 명인 김 선생은 전통 진주검무와 교방굿거리춤의 마지막 남은 유일한 보유자이자 우리 국악의 산 역사다.
그런 김 선생이건만 그는 지금껏 우리의 기억속에서 차츰 멀어져 왔다. 땅 끝 진주의 어느 한 골방에서 혼자 쓸쓸히 생활하던 김 선생을 다시 세상 밖으로 모시고 나온 것은 엉뚱하게도 한때 자신의 춤 제자였던 강금실 법무부 장관으로 인해서였다.
기자가 김수악 선생을 찾아간 것은 지난 10일 저녁이었다. 인터뷰는 김 선생이 현재 살고 있는 경남 진주시 평거동 주공아파트에서 있었다. 물론 그는 강 장관에 대해 얘기하길 극도로 꺼렸다.
김 선생은 춤 제자인 강금실 장관으로 인해 최근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강 장관 스토리를 취재한 기자들이라면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 이 때문에 김 선생과 언론의 숨바꼭질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3월 강금실 장관이 법무부 장관에 발탁된 이후 그가 강 장관의 전통무 스승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 시작된 전화를 통한 기자의 괴롭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단다.
<일요신문>의 인터뷰 요청에도 김 선생은 “찾아오지 마소. 난 절대 인터뷰는 안해. 어디 한 군데라도 나온데가 없잖은가”라는 말로 단호히 끊곤 했다. 하지만 7월8일 갑작스런 명창 박동진옹의 타계 소식을 접한 뒤 기자는 이를 빌미삼아 진주행을 감행했다. 막무가내의 인터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지 말라캤는데, 뭐하러 여기까지 왔노?” 김 선생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얼마 전 경남 진주시 평거동 주공아파트로 이사온 김 선생의 집을 어렵게 찾았건만, 그는 기자를 20여 분이나 문앞에 세워 두었다.
김 선생의 첫마디는 “내가 지금 씻지도 못해 모양도 엉망이고, 집도 이렇게 콧구멍만해서 앉을 자리도 없는데…”라며 당황해 했다.
얼마 전 한 방송사에서 찾아온 것도 안 찍겠다고 그냥 돌려보냈다는 그에게 비록 세월은 흘렀을망정 항상 단아하고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고픈 전통무용가의 자존심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난데없는 불청객의 방문에 당황한 김 선생은 서둘러 집을 좀 치우고, 간단하게나마 옷매무시를 가다듬느라 시간이 걸렸다. 명성과 달리 7평 남짓한 그의 아파트는 기자를 민망하게 할 정도였다.
▲ 강금실 장관 | ||
“참 재미있는 양반이셨지. 전혀 악의가 없는 욕지거리도 그렇게 구수했고. 그래도 우리들끼리야 상관없지만, 잘 모르는 높은 양반들 앞에서도 거침없이 욕을 하기에 내가 기겁을 해서 ‘선생, 제발 욕 좀 하지 말고 얘기 하세요’라고 사정하기도 했어.”
어렵게 꺼낸 김 선생과 강 장관의 스토리는 박동진옹에 대한 얘기가 무르익을 무렵 시작됐다. 두 사람의 인연은 서울올림픽이 있었던 지난 88년께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선생이 기억하는 강 장관과의 만남은 이렇다.
“서울올림픽 할 무렵쯤, 하루는 제자 중의 한 명인 부산의 손심심이가 여자를 한 명 데리고 왔어. ‘선생님 명성은 TV를 통해서 봤다’며 ‘춤을 배우고 싶다’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라고.”
그를 찾아온 강 장관에게 김 선생은 성심껏 춤을 사사했다.
“배우고 싶다고 청하는데 내칠 이유가 있나. 그래서 가르쳐 줬지. 그런데 곧잘 배우더라고. 얼핏 따라하는 폼이 제법 익힌 솜씨였어. 물론 그땐 그 여자가 판사인지 뭔지도 몰랐지.”
강 장관에 대한 그의 회고에는 진한 애정과 남다른 애착이 강하게 표시됐다. 딸보다 더 어리지만 그는 강 장관을 단 한 번도 하대하지 않고 꼬박꼬박 ‘그분’ ‘강 장관’ ‘강금실’ 등으로 호칭했다.
“난 항상 춤을 가르칠 때 인간으로서의 기본 품성을 먼저 강조하는데, 그분은 참 사람이 됐다 싶은 것이 소탈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고 자기에 대해 조금도 아는 체를 하지 않았어. 오히려 아는 것도 모른 척하고.”
강 장관에 대한 얘기를 들려주던 김 선생은 에피소드 한 토막을 공개해 기자를 박장대소하게 만들었다.
“낯선 제자가 갑자기 한 명 나타나니 다른 제자들도 자연 관심이 가지 않았겠나. 특히 춤추는 품새나 단정하고 반듯한 행동거지가 예사롭지가 않다고 느껴진 거겠지. 그래서 틈만 나면 강금실 곁에서 묻곤 했어. 뭐하는 사람이냐고 말야.”
이런 질문에 대해 강 장관은 “그냥 법원에서 일 좀 배우고 있다”고 대답하자, 질문을 한 사람은 “그럼 (법원에서) 타이프를 쳐요?”하고 물었고 이에 대해 강 장관은 그냥 “예”하며 배시시 웃었단다.
▲ 김수악 선생의 공연 모습. | ||
‘그런 자랑스런 제자가 법무부 장관이 되었는데, 왜 강 장관 얘기를 피하려고만 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는 “높은 데서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많이 배우고 많이 알아야 하는 것이지. 특히 우리의 것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런 점에서 난 강 장관이 폭이 넓다고 봐. 그런데 자꾸 주위에서는 춤을 배웠네 어쩌네 하면서 헐뜯으려고 한다고 안 그러는가”라며 언론에 대한 경계심을 나타냈다.
강 장관에 대해서 계속 질문이 이어지자 김 선생은 부담스러웠던지 “딱히 대접할 것도 없으니 나가서 식사라도 함께 하자”며 기자를 데리고 집 밖으로 나섰다. 자리를 옮기고나서 국악계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다시 강 장관 얘기를 슬며시 먼저 꺼낸 이는 김 선생이었다.
“춤은 맵시도 있지만, ‘춤씨’라고 하는 것이 따로 있지. 강금실이는 춤씨가 있어. 물론 얼굴도 예뻤고. 참 잘했지. 오히려 이전부터 죽 배워왔던 다른 제자들보다 나았으니까. 그것도 그거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참 좋았어. 염치가 있었지. 열심히 하고 겸손하고.”
최근 제자들에 대해 느끼는 서운함과 배신감 같은 것 때문인지, 그는 유난히 강 장관의 품성에 대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기자가 ‘(강금실 장관이) 장관이 된 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느냐’고 묻자 손사래를 친다.
“에이 뭐하려고 만나. 바쁜 양반인데. 바쁘지만 않으면 한 번 내려왔을텐데. 몇 해 전 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참 힘들어 했지. 모친이 또 훌륭한 분이셨거든. 안 그래도 장관 되고 나서 전화는 몇 번 왔었어. 건강하시느냐고 말야. 생각지도 않았는데, 반갑고 고맙더만.”
인터뷰를 마친 뒤 기자를 진주역까지 배웅해준 김 선생은 끝까지 강 장관에 대한 염려를 놓지 않았다. “기자 선생들 사이에서도 강 장관 평판이 좋지? 많이 도와줘야지. 그리고 내가 한 말들은 쓰지마. 괜히 큰일하는데 방해만 되고, 이 늙은이를 곤란하게 만드는거야.”
불가피하게 기자는 김 선생에게 또 한 번 무례를 범한 꼴이 되고 말았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