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친일파’ 민영은 후손의 ‘땅찾기 소송’에서 법원이 원심을 깨고 청주시 승소 판결을 내리자 청주시민대책위원회 관계자들이 청주지방법원 앞에서 만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5일 청주지법 앞에서는 시민단체들의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지며 태극기가 휘날렸다. 친일파 민영은(1870~1943)의 후손들이 청주시를 상대로 제기했던 ‘도로 철거 및 인도 등 청구 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민영은은 일제 강점기시절 충청북도 지역 유지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등 대표적인 친일파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09년에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된 바 있다.
애초 2012년 11월에 진행된 1심에서는 “청주시가 타인 소유의 부동산을 무단 점유한 것”이라며 법원이 민영은 후손들의 손을 들어줬다. 그동안 시가 관리해오던 청주중학교 인근과 서문대교, 청주 도심 도로 등 ‘금싸라기 땅’ 12필지(1894.4㎡, 공시지가 3억 700만여 원)가 친일파 후손들의 손에 넘어갈 뻔했던 위기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2심에서 “민영은이 친일 대가로 받은 땅”이라는 사실이 인정되며 원고 패소 판결이 내려지자 상황은 역전됐다. 민영은의 후손들은 비판 여론을 의식한 듯 상고를 포기했다. 법무부는 지난 2월 24일 해당 12필지를 국가에 귀속하기 위한 절차에 돌입했다. 법무부 관계자는 “12필지 중 미등기 토지인 8필지에 대해서는 소유권 확인의 소를, 민영은 후손 명의의 등기가 이뤄진 4필지에 대해서는 소유권 보존등기 말소의 소를 제기했다”고 설명했다. 이밖에 법무부는 민영은 후손들의 토지 처분을 막기 위해 처분금지가처분을 함께 신청한 상태다.
민영은 후손들의 토지 반환 소송은 결국 청주시의 승리로 일단락됐지만 전국 곳곳에 퍼져 있는 친일파 후손들의 땅이 또 다시 주목받고 있다. 친일파들이 소유한 토지 조사는 지난 2006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설치되면서 본격화됐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조사한 친일파는 모두 ‘168명’, 국가 소송을 통해 국고로 환수한 토지만 해도 총 ‘2359필지(1113만 9645㎡)’에 달했다. 이는 여의도의 1.3배에 해당하는 면적으로 공시지가만 해도 959억 원, 시가로는 ‘2106억 원’에 달한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는 설치된 지 4년 만인 지난 2010년 해체됐다. 당시 이명박 정권은 “위원회의 법적 설치기간이 종료됐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내세웠다. 결국 이전 정권의 유물을 폐지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친일재산조사위원회가 진행했던 업무는 법무부 국가송무과 소속 ‘친일재산송무팀’에 이관됐다. 친일재산송무팀은 친일재산조사위원회로부터 총 ‘96건’의 친일파 재산 환수 소송 업무를 넘겨받았다. 소송은 친일파 후손의 친일 재산을 국가로 귀속하라는 ‘국가소송’과 이에 불복해 친일파 후손들이 국가에 제기한 ‘행정소송’, 친일재산환수법이 위헌이라는 사실을 검토해 달라는 친일파 후손들의 ‘헌법소송’ 등으로 나눠진다.
청주시민대책위원회 회원들이 청주시 상당구 상당사거리에서 ‘이곳은 친일파 민영은의 후손들로부터 시민 여러분이 지켜낸 우리의 땅입니다’라는 글귀가 담긴 동판을 손으로 가리키고 있다. 연합뉴스
행정소송은 총 ‘71건’이 진행됐다. 그만큼 국가의 귀속 결정에 대해 친일파 후손들의 반발이 극심함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중 법무부는 64건을 승소하고 3건은 패소했다. 나머지 4건은 현재 진행 중이다.
패소한 소송은 ‘조선왕족’인 동시에 친일파였던 이해승 소송이다. 애초 이해승은 일제 강점기 때 후작의 작위를 받은 게 인정돼 ‘300억 원대’ 친일재산의 국가 귀속 처분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이해승 후손들이 소송을 제기해 치열한 법리공방 끝에 대법원에서 국가 귀속 건이 취소된 바 있다. 법무부 관계자는 “친일행위자가 한일합병의 공으로 작위를 수여받은 것인지, 친일행위의 대가로 인해 취득한 재산인지 여부에 대한 판단에 있어 법원과의 견해 차이가 있었다”고 전했다.
진행 중인 4건의 행정소송은 2월 27일 현재 3심까지 진행된 상태다. 법무부 관계자는 “모두 국가 귀속에 불복하는 소송이다. 개인정보 침해 우려가 있기에 소송 당사자는 확인해 줄 수 없다”고 전했다.
헌법소송은 9건 진행됐는데 모두 법무부가 압승을 거뒀다. 대표적인 헌법소송은 민병석, 이건춘 등 친일파 후손들이 제기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에 대한 헌법 소원심판이다. 만약 헌법재판소가 ‘위헌’ 판결을 내렸다면 국가가 귀속한 친일 재산은 모두 친일파 후손들에게 환수될 위험성이 있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1년 특별법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 이밖에도 친일파 이해승의 손자인 이우영 그랜드힐튼호텔 회장이 2012년 제기한 특별법에 관한 위헌법률심판 제청도 결국 합헌으로 판결났다.
현재까지 법무부는 친일재산을 처분해 모두 322억 1000만여 원의 기금을 조성했다. 향후 남은 소송에서도 승소한다면 기금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법무부는 해당 기금을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와 관련한 사업기금으로 조성하는 한편, 독립유공자의 생활 안정자금 등에 사용할 예정이라고 전해진다.
법무부 관계자는 “친일재산 환수는 역사적 정의 구현을 위한 온 국민의 염원”이라며 “앞으로 8건의 소송에서도 환수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전했다.
박정환 기자 kulkin8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