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필이 부르는 노래처럼 길어야 백년, 백년이고, 길어도 백년인데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삶을 중단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평균수명이 세계적인 나라에서 자살하는 인구도 세계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길게만 살 뿐, 결코 삶의 질은 높지 않다는 뜻이겠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세 모녀를 안타까워하며 박근혜 대통령은 “특히 이 분들이 기초 수급자 신청을 했거나 관할구청에서 이 상황을 알았더라면 정부의 긴급 복지 지원제도의 도움을 받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러나 과연 그 분들이 지금 우리나라 복지제도를 이용할 수 있었을까. 장애인이 아닌 60대 어머니와 30대 두 딸이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대한민국 국민은 거의 없다.
연간 자살자가 1만 5000명에 이르는 나라, 자살을 시도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30만에 이르는 나라, 나아가 자살을 고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600만에 이르는 나라, 그 나라가 우리나라다. 2012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자살 충동 이유 중에 39.5%가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란다. 빈곤 절벽에 내몰려 사회 안전망의 도움을 받지 못해 삶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자살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세상에 자살을 옹호하는 종교나 사상은 거의 없다. 윤회를 믿는 불교나 힌두교는 자살 한다고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살로 이생을 마무리한 사람은 다음 생도 평탄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기독교는 자살한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가르친다. 심지어 자살한 사람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없다고 장례식 집전조차 거부하는 목사들도 많다. 아마도 자살이 전염병처럼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자살은 절망의 표현이다. 희망의 온기가 미미하게라도 남아있으면 사람은 자살이라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는다. 그렇게 절망적으로 생을 포기한 자에게 다시 한 번 지옥에 간다고 저주하는 것은 일종의 투사라고 생각한다. 사회의 곳곳에서 들불처럼 번져있는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를 거둬내지 못하는 사회와 종교가 자신의 폐허를 그 절망에 쓸려나가 자살한 이에게 덮어씌우는 것이다.
자살한 사람이 많다는 것, 그것은 우리 사회가 살기 좋은 사회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랑의 마음, 자비의 마음으로 우리가 그들이 되어봐야 한다. 이혼하고 무일푼으로 아이를 키워 내야 하는 한부모가, 일하고 싶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기가 죽은 젊음이,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하는 장애인이, 그 장애인의 가족이,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아 외롭고 아프고 가난한 노인이, 공부만 하라는데 공부도 못하고 하기도 싫은 학생들이.
그들이 보이는 사람이 이웃이고, 그들을 보는 사람이 정치인이고 공무원이어야 한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