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핀 허친슨(왼쪽)과 에바 르 갈리엔. 허친슨은 르 갈리엔과의 간통죄로 남편에게 이혼소송을 당했다.
르 갈리엔은, 공개적인 커밍아웃까지는 아니었지만, 당시로선 이례적으로 자신이 레즈비언임을 애써 감추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그녀는 금광 상속녀이자 연인인 앨리스 델라마의 후원으로 ‘시빅 레퍼토리 씨어터’를 운영할 수 있었고, 당대의 톱배우였으며 바이섹슈얼이었던 탈룰라 뱅크헤드를 비롯 에스텔 윈우드, 블리스 데일리 등과 4인방을 이루며 어울렸다. 이때 만난 사람이 바로 알라 나지모바. 1917년부터 1922년까지 할리우드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던 여배우였으며, ‘바느질 클럽’이라는 이름을 만든 인물이었다. 나지모바와 르 갈리엔은 1918년에 만나는데, 나지모바의 질투로 그들은 헤어진다. 르 갈리엔은 매우 멀티플한 관계를 즐겼고, 나지모바와 연인일 때도 베아트리체 알리, 로레트 테일러 등 여러 여배우들과 관계를 맺었다.
흥미로운 건 알라 나지모바라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러시아 출신으로 1899년에 세르게이 골로빈과 결혼했지만 미국으로 오면서 이혼했고, 작가인 찰스 브라이언트와 재혼하는데 두 사람은 이른바 ‘라벤더 매리지’(lavender marriage) 파트너였다. 그들은 모두 바이섹슈얼이었지만 부부로 가장해 성 정체성을 감추고 있었던 것. 부부 관계와 무관하게 나름의 친교 관계를 즐기고 있었고, 나지모바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누리던 자신의 파워를 토대로 ‘바느질 모임’을 조직할 수 있었으며, 재능 있는 신인들을 후원하며 가끔씩은 그들과 로맨틱한 관계를 맺기도 했다. 모임의 멤버로는 앞에서 언급한 드 아코스타, 르 갈리엔과 4인방 외에 당시로선 드물었던 ‘여성 감독’ 도로시 아즈너, 오스카 와일드의 조카인 돌리 와일드 등이 있었다. 동성애자는 아니었지만 이안 러케트도 나지모바와 절친이었는데, 그녀는 레이건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낸시 레이건의 엄마로, 나지모바는 그녀의 대모이기도 했다.
왼쪽부터 진 애커, 알라 나지모바.
호모섹슈얼리티가 용인되지 않던 당시 할리우드에서, 진 애커는 발렌티노와의 결혼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려 했다. 하지만 첫날밤, 진 애커는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사람은 그레이스 다먼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결혼 6시간 만에 별거에 들어갔다. 발렌티노는 새로운 사랑을 원했고, 1921년에 <춘희>에 출연했을 때 상대역인 알라 나지모바의 친구이자 미술감독이었던 나타냐 람보바와 사랑에 빠졌다. 람보바 역시 나지모바에 의해 재능을 인정받아 할리우드에 정착했던 케이스. 그녀가 나지모바와 연인이었는지, 아니면 플라토닉한 관계였는지 논란이 있긴 하지만, 아무튼 발렌티노의 두 아내는 모두 나지모바와 로맨틱하게 엮여 있던 인물들이었다.
사실 당시 ‘바느질 모임’의 멤버들은 명확하게 동성애를 내세우며 ‘공동체’로서 존재했던 건 아니다. 만나서 파티를 즐기고 여성들 사이의 조금은 위험한 우정과 로맨틱한 감정을 나누던, 일종의 사교 클럽이었던 것.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연인이 되었다. 하지만 시대는 그들의 정체성을 허락하지 않았고, 이후 ‘바느질 모임’은 서서히 해체되고 멤버들은 조금씩 하향세를 겪게 된다. 그리고 긴 세월 동안, 할리우드의 게이와 레즈비언들은 벽장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