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와대 부속실장의 소임은 ‘집사’에 불과하지만 대통령의 사생활까지도 알 수 있어 마음만 먹으면 상당한 권력을 행 사 할 수 있다. 사진은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전경. 청와 대사진기자단 | ||
이번 파문의 영향 때문인지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도도 집권 초반 70%대에서 5개월이 지난 지금 37%(8월5일 리서치앤리서치 조사)로 급강하했다. 일부에서는 이번 사건이 지난 99년 김대중 정부 때의 옷로비 사건과 비슷한 양상으로 ‘악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청와대 부속실장이 어떤 자리기에 이토록 정권의 기반이 휘청거릴 정도로 파문이 커지고 있는 것일까. 일부에서는 양 전 실장이 주말을 이용해 옛날 경선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사람과 ‘정’을 나눈 게 무슨 큰 잘못이냐며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청와대 부속실장을 역임했거나 비서실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너그러운 해석’에 대해 펄쩍 뛸 정도로 거부감을 보이고 있다.
부속실장이라는 자리는 국가 1급비밀인 대통령의 사생활까지도 샅샅이 알 수밖에 없는 직책이기 때문에 무거운 입과 조심스런 처신이 필수 덕목이라는 것이 이들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대통령의 ‘울트라 측근’ 또는 ‘문고리 권력’으로 대변되는 청와대 부속실장에 얽힌 ‘소사’를 따라가 봤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령 비서실이 처음 생겨난 것은 제1공화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취임한 다음해인 19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승만 정부는 그 해 1월6일 ‘대통령비서관 직제’를 대통령령으로 제정, 시행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비서실의 기능이 지금의 국정수행 보필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히려 대통령 내외를 곁에서 ‘모시는’ 것이 주 임무였다고 한다. 이러한 기능이 훗날 청와대 부속실의 모태가 됐다.
청와대 부속실이 비서실에 공식적으로 편제된 시기는 박 대통령이 재선된 해인 1967년께였다. 박 대통령은 집권 초반기 비서실 운영을 단순화했지만 집권 2기를 맞아 경제부흥의 기치 아래 경제수석비서관제 등을 시행하면서 비서실이 매우 세분화됐다. 이때 대통령의 의전부문도 수석실로 승격되면서 그 산하에 대통령 내외를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부속실이 신설되게 된 것이다.
그 뒤 부속실은 5공화국 때까지 의전수석실에 소속돼 대통령을 보좌하는 제1부속실과 영부인을 보좌하는 제2부속실로 나누어지게 됐다. 5공 때는 김병훈 의전수석이 8년 동안 의전실을 지키면서 부속실도 관장했다.
6공화국으로 접어들면서 부속실은 또 한 번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의전수석실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기구’로 편제된 것이다. 이는 부속실이 편제상 상급부서장인 비서실장과 의전수석의 통제를 벗어나 대통령 직속으로 독립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6공의 부속실장은 문동후 전 월드컵조직위원회 사무총장이 역임했다.
6공 때까지의 부속실 기능은 말 그대로 대통령의 ‘집사’ 역할에 충실했다고 한다. 군사정권의 잔재가 남아있어서인지 ‘주군’에 대한 충성심이 대단했고 대통령의 사적인 생활도 ‘1급 비밀’로 분류돼 철저히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다. 여기에서 부속실장의 ‘무거운 입’은 필수적인 요소였다.
6공화국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노재봉 현 서울디지털대학 총장의 부속실장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자.
“5, 6공화국 때의 부속실장 자리는 말 그대로 대통령이 사적인 용도로 ‘쓰는’ 비서였다. 외부 문제와는 일체 관계가 없었고 대통령 개인 심부름이나 그밖의 대통령 내외 수발에만 전념했다. 부속실장이라는 자리가 무슨 대단한 권한 같은 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떠들고 있는 양길승 전 실장 문제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최고 권부에 있다고 해서 권력을 좀 행사해보려고 했는지 어떻게 됐는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는 이런 일을 상상도 못했다.”
청와대 부속실장이라는 직책이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김영삼(YS)정권 시절 장학로 전 부속실장의 부정축재사건 때문이었다. 장 전 실장은 검찰 조사 결과 지난 90년 3당 합당 이후 93년 2월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 각계로부터 7억원, 청와대 제1부속실장으로 근무하기 시작한 이후 96년까지 알선사례비와 떡값 명목으로 20억원 가량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큰 파문을 일으켰다.
청와대는 야당의 정치공세라며 사건의 파문 수습에 안간힘을 다했지만 결국 장 전 실장은 구속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청와대 부속실은 1실과 2실이 합쳐져 2부속실장이던 정병국 비서관(현 한나라당 의원)이 통합 관리하게 된다.
YS정부 시절 제1부속실장은 1급 상당 비서관이었고 그 아래에 5명의 직원이 근무했고 제2부속실장은 2급 상당으로 휘하에 4명이 일했다고 한다. 그리고 직급은 없지만 전기와 보일러 그밖에 관저 관리·보수를 담당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정리요원’이라고 불리는 청소 담당자 등 딸린 식구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장학로 파문은 부속실장이라는 자리가 가진 폭발력과 위험성이 처음으로 일반에게 회자되는 계기가 되었다. 장 전 실장 파문이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부속실장이란 ‘대통령의 퇴근 후 복장 식사 등 의전관계를 주로 담당하는’ 그저 그런 자리였다. 하지만 다음의 증언을 들어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 지난 96년 3월 구속 수감되는 장학로 전 청와대 부속실장. | ||
“부속실장은 대통령의 제2의 눈과 귀다. 대통령과 자연스럽게 마주칠 기회가 많다. 또한 대통령이 산책 같은 것을 해도 항상 따라가기 때문에 많은 시간을 대통령과 보낸다. 그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라든가 대통령 개인의 관심거리 등도 자연스레 화제에 오른다. 그러면 부속실장의 개인의견을 주로 듣게 되고 그것이 대통령의 의견형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리고 국정의 전반을 읽을 수 있는 능력 아닌 능력도 생긴다. 전화를 예로 들어보자. 관저에서 대통령에게 걸려오는 전화는 꼭 부속실을 거쳐야 한다. 그러면 부속실장이 꼭 바꿔줘야 할 사람인지 체크한 다음 연결을 시켜 준다. 그러면 현안이 생길 때 대통령이 누구에게 전화를 했는지만 파악해도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잡히는 것이다.”
다음은 김기수 전 청와대 수행실장이 말하는 부속실장의 역할이다.
“부속실장은 대통령의 거실이나 집무실도 드나들 수 있고 서신도 전달하는 중요한 자리다. 놓여진 책이나 그런 것들만 봐도 현재 대통령이 어떤 것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은 사소하게 보이지만 장관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고급정보다. 그리고 부속실장은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또 이야기할 기회도 많아 자연스레 대통령의 사적인 정보를 많이 접하게 된다.”
부속실장은 대통령을 거의 24시간 보좌하면서 때론 그의 눈과 귀가 되고 여론전달 통로가 되기도 하고 정책결정의 ‘보좌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여기에다 비서실 편제도 부속실장을 ‘언터처블’로 만들고 있다. 부속실은 지난 6공화국 때부터 의전수석실에서 떨어져 나와 지금까지도 독립돼 있다. 비서실장뿐만 아니라 수석들에게서도 ‘터치’를 받지 않는다.
정 의원은 이에 대해 “부속실장은 비서실장 아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업무상 감독을 받지 않는다. 또한 비서실장이나 수석들이 컨트롤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업무 자체가 모두 대통령의 일과 직결되기 때문에 다른 곳에서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부속실장이라는 자리는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대통령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고 권력 주변부 인사들에게도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는 자리다. 최근 양 전 실장 파문에 대해 정 의원은 매우 안타까운 심정을 밝혔다. 하지만 사안 자체에 대해서는 매우 심각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속실장이란 사람이 밤에 나가서 그런 사람들과 술자리를 가진 것 자체가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다. 더구나 로비 의도를 가지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라면 부속실장에 대해 ‘대통령을 대리해서 일하고 있는 사람인데 믿을 만할 것이다’ 또는 ‘부속실장 참석 자체만으로도 대통령이 지시해서 돌봐주라고 해서 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이런 부속실장의 잠재적인 ‘파워’를 생각할 때 정 의원은 “양 실장이 비록 주말이긴 해도 대통령 곁을 떠나 밤새 술 마시고 다음날 ‘천천히’ 귀경했던 것에 대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렇듯 어려운 자리이다 보니 무거운 입과 조심스런 처신은 필수적인 요소였다고 한다. 정병국 의원의 계속되는 얘기.
“부속실장은 굉장히 어려운 자리다. 나도 5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모셨지만 그 5년이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대통령 내외를 가까이서 모신다는 것이 일거수 일투족을 볼 수밖에 없고 내외가 하는 일이 나를 통해 외부로 전달될 수밖에 없으니까 사람 만나는 것도 굉장히 꺼려졌다. 그래서 나는 5년 동안 통행금지를 10시로 잡고 내 스스로 10시 이후에 사람을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밤늦게 사람 만나는 것은 거의 술자리이기 때문에 불미스런 일이 항상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국민의 정부’에서는 모두 세 명의 부속실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좌했다.
김 대통령 취임 초기부터 약 1년 동안은 고재방 전 교육부 차관보가, 99년 3월부터 12월까지 약 9개월은 김득회 현 IDR 회장이, 그리고 99년 12월 이후부터 올 2월 김 대통령 퇴임까지 약 3년 동안에는 김한정 비서관이 부속실장으로 재직했다.
임기 말 두 아들이 구속되고, 측근이 구속되는 등 권력형 비리가 없진 않았지만, 김대중 정부 5년 동안 ‘부속실장’이 구설수에 오르거나 언론에 오르내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YS정권 시절 ‘장학로 사건’이 반면교사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 양길승 전 실장의 ‘몰카’ . SBS 촬영 | ||
99년 약 9개월간 부속실장을 지낸 김득회 전 실장은 부속실장 임명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정책비서관으로 재직하다 부속실장 임명을 통보 받았다. 임명소식을 듣고 한 청와대 출입기자가 찾아와서는 ‘굉장히 어려운 자리로 가게 됐는데, 어떻게 할거냐’고 묻더라. 그때 처음 대통령님을 모실 때 마음 속에 새겨두고 있던 세 가지 원칙을 얘기해줬다. 첫째 입이 무거워야 한다. 둘째 청렴해야 한다. 셋째 겸손해야 한다. 부속실장 재임기간 내내 그때 말했던 세 가지 원칙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김 전 실장은 대과없이 부속실장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비결을 이렇게 설명했다.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부속실장은 각종 정보들을 접하게 된다. 특히, 대통령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이 많은 기자나 정치인들로부터 많은 문의 전화를 받게 된다. 처음 한두 달 동안에는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랬더니 한동안 섭섭하다는 반응을 보이더니 나중에는 전화가 거의 걸려오지 않더라. 가끔씩 전화가 오기도 했는데, 새로 청와대를 출입하게 된 기자들 전화였다.”
김득회 전 실장은 ‘부속실장’ 업무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부속실장에서 물러난 뒤에는 적지 않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고 토로했다.
“총선 출마를 위해 부속실장을 그만두고 나와보니, 그 순간부터 철저하게 나 혼자만 남아 있더라. 정말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간혹, ‘부속실장’직을 제대로 수행했다는 평가를 해주시는 분도 계셨지만, ‘높은 데 있을 때 잘하지 그랬느냐’며 섭섭하다는 반응이 더 많더라.”
김 전 실장은 2000년 총선 당시 고향인 전북 전주 출마를 위해 공천 신청을 했지만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뒤 안건회계법인 부회장을 거쳐, 현재는 IDR 회장으로 있다.
김 전 실장은 ‘부속실장’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중립성’을 꼽았다. 무엇보다 정치적 중립성이 중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부속실장은 정치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어떤 불이익이 있다하더라도 대통령 보좌에만 충실해야 한다. 그만큼 중요한 자리다. 대통령에게 보고되는 모든 보고서를 취합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정보 왜곡가능성이 상존한다고 볼 수도 있다. 만약 부속실장이 정치적 편향을 가지고 있다면, 보고서를 작성하는 주체가 대통령에게 확실히 보고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부속실장의 정치성향을 감안한 보고서를 만들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는 것이다.”
중립적 보좌를 역설한 김 전 실장은 동시에 적극적 보좌의 중요성도 역설했다.
“당시 빡빡한 국내외 일정을 소화하는 대통령께서 세계사의 조류와 흐름을 놓치지 않고 참고하실 수 있도록 세계 유수 석학들의 시각이 담긴 저서를 미리 읽고 요약 보고해드렸다. 번역서가 나와 있는 것은 물론 번역되지 않은 서적도 인터넷으로 원서를 구해와 미리 읽고 요약해 보고 드렸다”며 “대통령께서 긴요하게 참고하시는 것 같아 보람 있었다”고 회고했다.
3년 동안 김 전 대통령의 부속실장을 역임하고, 퇴임 후에도 계속해서 비서관으로 재직중인 김한정 비서관은 “아직도 어른을 모시고 있는 입장에서 이렇다 저렇다 말할 입장은 아니다”며 “말 한마디가 곧 어른의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아 조심스러운 자리”라고 말했다.
그는 얼마 전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부속실장이 무엇을 하는 자리인지도 잘 몰랐다. 그야말로 대통령의 일상을 챙기는 문자 그대로의 ‘비서’ 역할을 하는 거다. 대통령의 사적인 스케줄을 챙기는 일, 대통령이 시키는 잡다한 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자리였다.
외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연결하고, 대통령이 통화를 원하는 외부 인사를 찾기도 한다. 대통령께서 독서를 좋아하시니 신간 서적을 챙기는 일도 했다. 김 대통령은 토요일 오후에는 거의 독서와 자료 챙기는 일을 하셨다. 평일에는 보통 10시까지, 어떤 때는 저녁도 거르시고 일을 하시니 부속실 일도 만만치 않았다.
이전 정권 부속실장 중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된 사람도 있고 해서 굉장히 신중하려고 노력했다. 부속실장은 절대 명함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되는 자리다”며 신중한 처신을 강조한 바 있다.
그는 “지금도 명칭은 바뀌었지만, 부속실장과 다름 없는 역할을 하지 않느냐”며 ‘입이 없는 비서’로서의 자신을 이해해달라며 양해를 구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 구자홍 기자 jhk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