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장의 배우 역할이던 윤태식 씨도 희생자였다. 속죄하고 형을 살았어도 이미 자유인이 되었을 시점이었다. 그 사이 기업인으로 성공한 그는 졸지에 공소시효가 한 달 남은 시점에서 날개도 없이 절벽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그의 입을 통해서 파충류 같은 악의 꼬리를 일부 봤다. 그는 담당 수사팀장이 10년여 동안 거머리같이 달라붙어 자신의 피를 빨아먹었다고 했다. 기업인으로 성공하자 승용차를 뺏기도 하고 매월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일정 기간마다 남산근처의 호텔 방으로 불러 상습적으로 패더라는 것이다.
정보기관이 이중구조였다. 고위직은 잠시 왔다가는 정치적 철새였다. 대통령 마음에 들 반짝 사건이 관심사였는지 모른다. 정부예산이 들어가는 국가 정보기관의 존재이유와 역할이 분명히 있다. 날아오는 미사일을 거꾸로 요격하는 미사일이 있듯이 몰래 스며드는 북한의 테러요원을 중간 어느 지점에서 제거하는 비밀공작이 수행될 수도 있다.
그런 비밀공작은 법치주의의 한계를 넘는 행위다. 몰래 적지에 침투를 하기 위해 정보기관 내부에서 위조전문가가 땀을 흘릴 수도 있다. 국가를 위한 불법은 세계 정보기관의 공통된 기능이다. 그런 속에서 중요한 것은 정보공작요원의 사상과 신념이다. 그들의 정신 속에 무얼 지켜야 하느냐는 확실한 철학이 있어야 한다. 일을 해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표어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잘 사는 듯해 보이는 우리 사회는 어쩌면 어항 속의 금붕어 같은 상황인지도 모른다. 얇은 유리 한 장만 깨지면 파멸인데도 안전 불감증에 걸려 있다. 돈 있는 교활한 계층은 상당수가 미국 영주권을 받아 놓고 여차하면 도망갈 마음도 가지고 있다. 돈이라는 두꺼운 벽 속에서 자살자가 있는가하면 세상이 뒤엎어지길 원하는 마음들도 도사리고 있다.
국민들의 불안을 교묘히 부채질하고 선거에도 개입하는 북한의 심리전은 미사일보다 무섭다. 국가와 우리 사회의 안전을 위해서는 그런 문제들을 캐치하는 민감한 신경조직과 보이지 않는 손이 필요하다. 그게 정보기관이다. 국가정보조직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암 덩어리는 떼어 내고 사람은 살려야 한다. 이 기회에 국가정보원은 나라의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로 다시 바뀔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엄상익 변호사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