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당시 상황을 현장검증하고 있다. 연합뉴스
차지철은 비서실을 통하지 않고 박 대통령과 면담이 가능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청와대 출입까지도 통제했다. 이 무렵부터 차지철은 김재규와 정보경쟁을 하면서 접근을 차단하려고 애썼다. 차지철이 정보기능을 강화하고 사설정보기구까지 설치해 정보활동에 열을 올리면서부터 박 대통령은 김재규보다 차지철을 더 신임했다.
차지철은 자유당 시절 육군헌병감을 지낸 이규광을 팀장으로 사설정보팀을 운영해 중앙정보부와는 별도의 정보보고를 올렸다. 그는 이 사설조직을 통해 김재규가 올린 정보의 정확성 여부를 검증하며 정보부 보고가 부정확한 것이라고 깎아내렸다. 김재규와 정보부 요원들은 차지철의 행위는 정보부에 대한 도전이라며 분노했다.
두 사람은 야당과 재야 반체제세력의 개헌투쟁에 대응하는 방법을 놓고도 대립했다. 당시 차지철은 강경파, 김재규는 온건파로 분류되었다. 차지철은 점심 대접을 명목으로 수시로 정보부장을 경호실에 불러들여 김영삼과 야당의 반체제투쟁에 대한 정보부의 미온적 대응자세를 비판했다.
차지철은 1979년 2월 제10대 국회개원을 앞두고 국회와 여당의 요직 개편문제에도 나섰을 뿐 아니라, 국회상임위원장 임명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며 자기 사람을 선임하도록 했다. 김재규는 차지철의 이러한 일련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특히 김재규는 차지철이 정보부에는 미국 CIA의 첩자가 많다느니, 정보부의 정보보고는 경찰 정보를 복사한 것이라느니 비판하고, 정보부가 야당과 반체제세력에 대해 너무 미온적이라고 공격할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수모를 느꼈다.
김재규는 청와대에서 돌아가는 길에 김계원 비서실장실에 들러 “차지철, 이 자를 죽여버리겠다”고 격한 감정을 토로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당시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갈등과 암투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이러한 위험성을 지적하고 두 사람의 화해와 협력을 종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들에게 설득력 있게 의견을 말하고 충고할 사람은 김계원 비서실장뿐이었으나 그는 그런 재능이나 용기나 사명감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통치자는 자주 인재를 바꾸면 충직한 참모를 거느리지 못하지만 때로는 ‘훌륭한 도살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박 대통령이 차마 도려내지 못한 측근 3인방 중 김재규는 대통령을 시해했고, 차지철은 자신의 월권행위가 잘못된 일임을 깨닫지 못한 채 살해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비극의 현장에서 문기둥을 붙잡고 벌벌 떨던 육군대장 출신 김계원은 방관자로 살아남았다.
김임수 기자 ims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