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위)의 ‘황제 노역’ 사태로 향판과 지역 토착세력의 유착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3월 28일 열린 수석부장판사회의.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을 깨고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과 벌금 254억여 원을 선고하면서 1일 노역장 유치 금액을 5억 원으로 책정했다. 이후 항소심 판결에 대해 허재호 전 회장 측만 상고했고 대법원은 허 전 회장 상고를 기각했다. 허 전 회장에게 일당 5억 원짜리 황제 노역을 결정한 항소심 법관은 29년간 광주와 전남 지역에서만 근무한 장병우 전 광주지법원장이었다.
법원에 비난이 쏟아지자 법원은 당초 검찰이 벌금형의 선고유예를 구형한 사건이었다고 검찰로 화살의 방향을 돌렸다. 검찰은 허 전 회장의 1심에서 징역 5년에 벌금 1016억 원을 구형하면서 ‘탈루한 세금을 모두 냈고 기업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재판부에 벌금형에 대한 선고유예를 구형했다.
결국 1심에서 허 전 회장에게 선고유예를 구형한 검사 또한 전남 순천 출신이고 비상식적인 항소심 판결에 대해 상고하지 않은 검사도 광주 출신에 현재 광주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났다.
여기에 더해 허 전 회장의 부친이 광주·전남지역에서 37년간 판사로 재직한 향판 출신인 데다 매제는 광주지검 차장검사 출신 변호사, 사위는 광주지법 판사, 동생은 2000년대 법조비리의 상징으로 지목된 전·현직 판사들의 골프모임 ‘법구회’의 스폰서 역할을 한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됐다. 또 허 전 회장의 여동생이 지난해 법무부 산하 교정중앙협의회 회장을 맡은 사실도 드러났다.
향판 문제는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다. 선재성 전 광주지법 부장판사는 회생절차에 들어간 기업들에게 친구를 변호사로 소개하고 뇌물을 받은 혐의로 재판을 받아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지난해에는 순천지원의 최영남 부장판사가 1000억대 교비를 횡령한 서남대 설립자 이홍하 씨에게 보석을 허가해 향판 문제가 불거졌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작년 이홍하 씨의 보석으로 향판 문제가 불거졌을 때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는 향판제도를 옹호한 바 있다. 양 대법원장은 당시 한 토론회에 참석해 “외국에는 법관의 근무지 확정의 원칙이 있다”면서 “법관이 전국을 순환해서 근무하는 것은 원시적인 제도”라고 지적했다. 그는 “순환근무로 법관이 자꾸 바뀌어 소송이 지연되고 지역 사정을 잘 모르고 판결하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며 향판제도 유지 입장을 밝혔다.
법원 인사는 오랫동안 크게 수도권 지역과 지방을 순환하며 근무하는 ‘경향교류제’와 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는 ‘향판’, 이 두 축으로 운영돼 왔다. 이 같은 인사 방법은 수도권 집중을 해소하고 잦은 인사이동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지만 향판의 경우 한 지역에서 오래 근무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역법관 출신인 향변과 지역 유지들과 친분을 쌓게 되고 결국 판결을 선고하는 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법원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보 제한 기간을 10년으로 하는 ‘지역법관제’를 도입했지만 이 같은 커넥션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박스 기사 참조). 고등법원 관할에서 10년을 법관으로 근무하면 법관 자신도 그 지역의 토호가 돼버리기 때문에 인사이동을 적어도 고등법원 관할 지역에서 5년 이상 근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향판은 향변이라는 또 다른 ‘괴물’을 낳고 있다. 향판의 경우 다른 지역에서 근무한 경험이 없어 퇴임하더라도 전임지에서 개업하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향판이 향변으로 이어지고 이는 전관예우를 근절하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로 지적되기도 한다. 여기에 로스쿨 도입 등으로 변호사들의 사건 수임이 어려워지고 있어 로스쿨을 졸업 후 바로 변호사 개업을 하는 경우에는 대부분 연고지로 내려가는 경향이다. 사건을 한 건이라고 더 수임하기 위해서는 학맥이나 인맥을 동원할 수밖에 없어 향판과 향검에 줄대기가 더욱 심해질 우려도 나오는 형편이다. 향판의 문제가 향변의 문제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구조인 셈이다.
서울의 한 검사는 “예전에는 지방 근무를 하게 되면 지역 유지들로부터 연락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면서 “지금은 예전 같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어떻게든 만나게 되는 자리가 생긴다”고 말했다. 그는 “한 선배 검사는 지인과의 저녁식사 자리에 사전에 얘기도 없이 그 지역 유지를 데리고 나와서 식사도 안하고 왔다고 한다. 하지만 지인과의 관계 때문이라도 이렇게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현실상 접촉을 차단하기가 쉽지 않음을 내비쳤다.
검찰도 잦은 인사이동에 대해 구성원들의 불만이 커지자 한때 법원과 같은 형태의 ‘향검제도’를 도입할 계획을 세웠지만 법원보다 더 지역 토착 세력들과의 유착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 결국 향검제도를 도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찰도 지역 출신 수사관들이 수십년 동안 자신들의 ‘고향’에서 근무하며 ‘3향’의 한 축으로 활동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검사의 경우 한 지역에 오랫동안 근무하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향검’의 문제는 향판이나 향변보다는 덜하다는 게 법조계 시각이다.
그런데 ‘딸깍발이 판사’로 널리 알려진 조무제 전 대법관이나 배기원 전 대법관 등 올바른 처신으로 지역사회에서 큰 존경을 받는 향판들도 많다. 이 때문에 법원행정처의 ‘향판 제도 폐지를 적극 검토하고 있다’는 발표에 대해 향판들은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지만 여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충분한 검토 없이 이번 사태의 책임을 향판들에게 돌리는 것에 대해 불만인 것으로 전해졌다.
대법원은 2004년 지역법관제도를 도입·시행하면서 지역법관들에게 인사나 복지 등을 우대하는 등 상당한 인센티브를 줄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일각에서는 ‘황제노역’ 사태가 발생한 데에는 비단 향판의 지역 토착세력과의 유착 문제 때문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서울의 한 변호사는 “이번 사태가 발생하게 된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법원 내에 환형 유치에 대해 제대로 된 기준이 없고 모든 것을 판사에게만 맡겨 둔 데에서 비롯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일반인의 경우 통상 지방법원이 수도권 지역보다 형을 세게 선고한다는 게 정설로 통하고 있다”면서 “결국 개인 간의 편차가 너무 크다는 것은 그만큼 판사의 재량의 폭이 너무 넓다는 것이고 이를 통제하는 수단 마련이 절실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실제 허 전 회장의 1, 2심 판결문을 보면 어떤 기준에 따라 환형유치 금액을 책정했는지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없다. 다만 주문에만 환형유치 금액이 명시돼 있을 뿐이다.
한편 여론에 등 떠밀린 대법원은 최근 1억 원 이상의 고액 벌금형을 선고하는 경우 노역기간의 하한선을 정하는 등 환형유치 제도를 전면 개선하기로 했다. 또 2004년부터 도입한 지역법관제를 폐지하는 방안 등도 검토 중이다. 대검도 ‘황제노역’ 방지를 위해 ‘재산 집중 추적·집행팀’을 설치했다.
윤지원 언론인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