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씨가 구속된 이후 군 안팎의 시선은 그의 입에 쏠리고 있다. 그가 막강한 군 인맥을 형성해온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 그런 그가 검찰에서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향후 군납비리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정작 정씨가 더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이유는 또 있다. 2년 전 국내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기스타 심은하씨와의 결혼설이 계기였다. 그는 지난 2000년과 2001년 사이 심씨와 숱한 화제를 뿌리며 결혼 직전까지 갔다가 결국 결별했다. 2년 전 심은하씨와의 결혼설로 세간의 집중 조명을 받았던 그의 실체는 지금 다시 한 번 의문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만큼 그의 정체는 미스터리다.
이번 군납비리 수사가 시작된 단초는 김동신 전 국방장관의 뇌물 수수혐의였다. 지난 9월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불구속기소된 김 전 장관의 혐의에 대해 수사를 하던 중 진급비리 관련 첩보를 접했고, 여기서 이원형 전 국방품질관리소장(예비역 육군 소장)의 폭넓은 뇌물 수수 혐의를 포착했다.
이 전 소장이 갖고 있던 10개의 차명계좌 추적을 통해 드러난 또 한 명의 로비 핵심이 바로 정호영씨였다. 이때부터 정씨는 ‘무기 군납비리’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정씨 주변의 군 인맥이 줄줄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천용택 전 장관과 유보선 차관 등 국방부 거물급 인사들과 전·현직 고위 장성들의 이름들이 끼어있었다. 그가 개인적으로 소유한 여러 회사에 군 출신 인사들이 경영진으로 대거 영입된 사실도 밝혀졌다.
초기 수사를 맡았던 경찰청 특수수사과의 한 관계자는 “이 전 소장과 정씨가 현재 군납비리의 핵심 인물이다. 두 사람은 현재 서울지검에서 조사를 받고 있지만, 아직도 이들의 계좌추적 작업을 벌이고 있는 중”이라고 전했다.
80년대 말 무선정보통신업으로 사업에 뛰어든 정씨는 90년대 초부터 방위산업에 눈을 돌린 것으로 알려졌다. 군용 레이더와 전자광학설비 생산 등 무기분야에 뛰어들면서 지난 99년에는 저고도 대공화기인 오리콘포 개량 사업자로 선정되었고, 이후 ‘데이터정합기’ 등 수백억원대의 물품을 납품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93년 예비역 육군준장 이아무개씨의 영입을 시작으로 군의 주요 인사들과 꾸준히 접촉하며 장성 출신들을 회사 간부로 영입하기 시작했다. 그의 인맥 활용 창구는 작고한 부친의 군 후배들 모임에 대한 지원과 서울고 동문조직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씨는 2년 전 자신의 부친을 ‘육사 2기 출신의 전직 군장성’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정씨의 한 측근은 “천성적으로 대인관계가 좋은 정 회장은 특히 부친이 작고한 뒤에도 부친 친구분들을 자주 찾으며 안부를 전하고, 동기 행사가 있으면 힘 닿는 대로 적극 지원하는 등 부친과 연관있는 사람, 관련된 일이면 가리지 않고 챙겼다”고 밝혔다.
당시 이 측근의 말은 정씨의 원만한 대인관계와 부친에 대한 애정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또한 군납사업을 위한 로비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의심받게 됐다.
정씨는 서울고 동문 인맥도 자신의 사업에 적극 활용했다. 지난 98년부터 정씨로부터 교통비조로 월 2백만원씩을 받아온 것으로 알려져 문제가 된 유 차관은 “전역 후 쉬고 있던 고교 선배를 돕는 차원에서 돈을 준 것 같다”고 밝혔다.
이번에 정씨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최병모 민변 회장 역시 “서울고 동문 선후배로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안다”고 주변에서 전하고 있다. 정씨가 2년 전 영화배우 심은하씨와의 결혼 계획을 발표하면서 주례로 소개한 이수성 전 총리 역시 서울고 출신. 정씨는 당시 이 전 총리에 대해 “예전부터 내가 잘 따랐고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 주었던 각별한 분”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확인 결과 정씨는 서울고 출신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정씨 주변에서는 “서울고를 졸업한 것이 아니고 중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서울고 동문회측은 “최근 정씨에 대한 동문의 문의가 쇄도해 알아본 결과, 졸업은 물론이고 입학한 사실도 없는 것이 확실하다”고 밝혔다.
▲ 정호영씨의 인맥으로 거론된 천용택 의원(왼쪽)과 뇌물수수로 기소된 김동신 전 국방장관. | ||
경찰청의 한 관계자는 “수사 결과를 언론에 알린 이후인 지난 12일 한 스포츠신문이 ‘문제의 정씨는 심은하씨와 결혼설이 나돌았던 바로 그 장본인’이라고 해서 그 사실을 알게 됐다”고 밝혔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베일에 싸여있던 정씨의 실체가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그리고 그의 학력과 경력 나이 등 모든 이력에 대한 의혹들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정씨의 고향은 확실치 않으나 원적은 부산, 본적은 충남 홍성인 것으로 알려졌다. 부친이 작고하면서 집안이 어려워졌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전언. 모친은 현재 미국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고교에 입학하자마자 바로 미국에 건너갔다고 한다.
미국에서 공부를 한 뒤 지난 87년 귀국한 정씨는 국내 H그룹에 1년간 몸담았다가 바로 독립, 사업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는 처음 언론에 사업가 C씨로 알려졌다.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90년대 정보통신사업에 뛰어들면서 상당한 재산을 모은 벤처기업인으로 소개되었다.
정씨가 처음 언론에 노출된 것은 2000년 11월. 심은하씨와 나란히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것이 취재진에 포착되면서부터였다. 톱스타인 심씨에게 사귀는 남자가 있다는 뉴스는 단연 화제였고 이때부터 정씨의 존재가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후 심씨, 정씨와 취재진의 숨바꼭질은 그 해 연말을 지나 두 사람의 완전 결별이 발표된 2001년 연말까지 이어졌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 대해서는 전직 군 장성으로 알려진 정씨의 부친과 역시 직업군인 출신인 심씨의 부친과의 인연 때문인 것으로 전해졌으나, 이 또한 사실과 차이가 있다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평소 심씨에게 관심을 갖고 있던 정씨가 영화쪽에 발이 넓은 후배를 통해 심씨와의 만남을 부탁했고, 99년 영화 <텔미섬씽> 촬영도중 후배의 주선에 의해 자리를 함께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씨는 주변에서 항상 ‘형’으로 통하며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씨 주변 인사들은 “정 회장은 사람을 좋아해 따르는 사람이 무척 많았다. 어떤 때는 하루 저녁 모임이 세 군데나 겹칠 정도였다. 여기저기서 ‘형’하고 부르는 후배들이 많았는데 항상 반가운 얼굴로 후배들을 일일이 챙겨주곤 했다”고 전했다.
정 회장은 호방한 성격만큼이나 외모 역시 나이에 비해 아주 젊어 보일 정도로 호남형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별명은 ‘탄 크루즈’. 미국의 영화배우 톰 크루즈와 닮았으나 얼굴이 좀 탄 편이어서 붙여진 별명이라고 한다.
당시 정씨를 취재했던 기자들은 한결같이 정씨에 대해 비교적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한 여성월간지의 기자는 “매달 반복되는 밀착 취재에 다소 언짢아할 수도 있었는데도 비교적 유연하고 때론 화통하게 기자를 대해주곤 했다. 밤늦게 집에 찾아온 기자를 선뜻 집안으로 들여 맥주나 한잔 하자고 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정씨의 한 측근은 “그는 부친뻘 되는 선배든 한참 동생뻘 되는 후배든 가리지 않고 인간 교류의 폭이 넓었다. 재벌 2세들이 얼마나 자기들끼리의 울타리가 강한가. 정 회장은 재벌 2세도 아니었고 명문학교 또는 해외 유학파끼리 뭉치는 동문 인맥이 없었음에도 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그들로부터 깍듯이 ‘큰형’ 대접을 받곤 했다”고 전했다.
정씨는 의외로 검소한 생활을 했지만, 돈은 화통하게 쓰는 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따르는 후배들이 많았다는 것. 명문가 자제들이나 유명인들이 얼굴을 내미는 소위 ‘그들만의 모임’에서도 그는 곧잘 스폰서 역할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심은하씨가 자신과의 스캔들로 인해 광고주로부터 소송 위기에 몰리자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므로 내가 처리하겠다”며 현금 5억원과 논현동의 집 문서를 심씨측에게 건네기도 했다.
특수수사과 관계자 역시 “정씨는 때론 의외라고 생각될 만큼 시원시원하게 진술하기도 했다”며 “그의 성격으로 미뤄볼 때 검찰 조사에서 의외로 모든 것을 다 솔직히 고백할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정씨는 연예인들과도 교류가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무척 좋아했던 그는 방위산업체 사업을 하면서도 광고마케팅 사업과 영화제작 사업에도 관심을 갖고 참여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정씨는 연예인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경우도 많았다는 것. 두 사람의 관계가 악화된 뒤 심씨가 정씨에게 “연예계를 너무 우습게 여기지 말라”고 충고했다는 후문도 있다.
결혼설이 나돌던 초기만 해도 심씨는 “오빠(정씨)는 흔들리지 않는 산같은 사람이다. 나를 위해 유머도 준비하고 언제나 나를 배려하는 따뜻한 사람이다”며 각별한 애정을 표시했으나, 나중에는 “전혀 믿지 못할 사람”으로 치부했다.
지난 2001년 연말 심은하씨가 정씨에게 결별을 선언하면서 내뱉은 한마디는 “오빠,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려고 하지 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