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재판장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1980년대 초 군판사 생활을 했었다. 총기를 든 채 부대를 이탈해서 인질난동을 벌이는 사건이 유난히 많았다. 현장에서 착한 처녀가 시체가 되어 차디찬 스테인리스판 위에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총에 맞은 여러 명의 다른 시신도 보았다. 사형은 내가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판사는 사회적 십자가를 져야 하는 괴로운 직업이었다. 그 각오가 없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
어린아이의 새 같은 가슴을 짓밟아서 죽인 계모가 있다. 갈비뼈가 열네 대 부러졌다. 아이는 소풍을 가고 싶다고도 했고 텔레비전을 보는데 옆에서 운다고 때려 죽였다. 두 살짜리 아들을 게임을 하느라 방구석에 그냥 놔두어 굶겨 죽인 후 쓰레기통에 가져다 버린 아버지도 있다. 이들은 이미 사람이 아니라 악마다. 전해지는 보도만으로도 가슴이 막히고 속에서 주먹 같은 게 불끈 치솟는다. 신문 1면에 그들을 사형시키라고 절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꺼멓게 찍혀 나왔다.
어린 양 같은 아이들의 처참한 죽음에 대해 법은 분노하지 않는 것같이 보이고 있다. 법원은 죄명과 양형기준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논리다. 도대체 그 양형기준이라는 것이 뭘까. 거기에 얽매여 엄벌할 악마가 빠져나오고 선량한 사람에게 엉뚱한 중형이 선고되어도 되는 것일까.
1년 전 대법원의 한 고위 법관과 사석에서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대법원의 획일적인 양형기준이 과연 실질적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아무리 대법관들이 훌륭해도 현장을 본 판사가 인간의 눈으로, 그리고 법관의 양심에 따라 형량을 정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았다. 그 법관은 내게 양형기준을 만든 배경의 일면을 솔직하게 말해 주었다. 여론이 하도 재벌에게 솜방망이라고 질타를 해서 만들게 된 게 사법부의 양형기준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 양형기준은 소수의 재벌뿐만 아니라 다수의 국민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앞으로 엉뚱한 피해가 나올 수 있다고 예측했다. 왜냐하면 양형기준이란 단순한 대법원의 권고사항이지만 모범생인 판사들은 경쟁적으로 그 기준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하급심에서 올라오는 사건을 보면 기준에 집착해서 부당하게 선고된 사건을 많이 봤다고 털어놓았다.
나도 어느새 법의 밥을 30년이 넘게 먹었다. 정말 잘못이 없는데 평생 징역을 살았다고 피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봤다. 기록 속의 거짓말만 보고 선의를 악의로 단정하는 대법관도 보았다. 도식화된 법리와 고정관념 그리고 율법주의에 매이면 소경 같은 법관이 나올 수 있다. 세상은 율법보다 솔로몬 같은 지혜의 법관을 요구한다. 법에도 눈물이 있어야 하고 세상이 분노할 때 법도 분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다. 그게 영혼이 깃든 법이다.
엄상익 변호사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