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벤츠의 아내 베르타 벤츠는 남편 몰래 모터바겐을 몰고 106㎞ 장거리 주행에 성공, 가솔린 자동차 시대의 개막을 앞당기는 데 일조했다. 사진출처=메르세데스-벤츠 웹사이트
당시 제작된 페이턴트 모터바겐은 모두 3대로 알려진다. 한 대는 독일박물관에 기증됐고, 다른 한 대는 연구개발용으로 활용됐으며, 나머지 한 대가 실제 운전에 사용됐다고 한다. 물론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 전시된 차는 페이턴트 모터바겐 모델을 똑같이 재현한 복제품이다. 하지만 이 차에 깃들어 있는 흥미로운 역사를 알고 관람한다면 그 존재감이 남다르게 다가올 듯하다.
세계 최초로 가솔린 자동차를 발명한 칼 벤츠는 1844년 독일 카를스루에에서 태어났다. 그의 나이 세 살 때, 증기기관차 기사이자 엔지니어이던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집안이 크게 기울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에 호기심 많은 소년 벤츠는 그래머 스쿨(당시 중등학교)를 거쳐 공과대학으로 유명하던 카를스루에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한다. 당시는 말이 끄는 마차가 주요 운송수단이던 시절. 대학생 벤츠는 이때부터 ‘말 없이 움직이는 마차’, 즉 자동차(Motorwagen)를 만들겠다는 꿈을 품게 된다.
사회에 나와 엔지니어와 공학 디자이너로 빠르게 성장한 청년 벤츠는 27세의 젊은 나이에 동료 엔지니어와 함께 자신의 첫 번째 엔지니어링 회사를 세운다. 하지만 파트너와 결별해 홀로 회사를 운영하다가 이후에도 몇 차례에 걸쳐 회사를 세우고 떠나는 일을 반복하게 된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자동차’를 만드는 데 있었지만, 파트너들은 그의 발명품과 기술력을 활용해 다른 돈벌이를 하는 데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미 18세기 후반에 증기기관을 이용한 자동차가 등장하고, 증기기관 버스까지 나온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음과 매연, 그리고 도로 파손 등의 이유로 증기기관 자동차는 규제를 받게 되고, 대중과 멀어졌다. 벤츠는 무겁고 탈 많은 증기기관을 대체할 새로운 동력으로 ‘가솔린으로 구동하는 엔진’을 연구했고, 1879년 연말 새로운 가솔린 엔진을 발명한다. 이후 엔진의 성능을 계속 향상시키는 한편, 전기 점화 장치와 클러치 등의 특허를 딴 그는 마침내 1986년 세계 최초의 가솔린 엔진 자동차를 내놓게 된다.
지난 8일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최덕준 벤츠 코리아 부사장(오른쪽)과 정국현 DDP 경영단장이 세계 최초의 자동차 ‘페이턴트 모터바겐’ 기증식을 가졌다. 연합뉴스
최초의 페이턴트 모터바겐 모델은 1기통 가솔린 엔진을 수평으로 장착한 배기량 954㏄의 삼륜차였다. 최대 출력은 0.75마력에 불과했지만 증기기관 자동차에 비해 무게를 획기적으로 줄인 덕분에 최고 속도는 시속 16㎞에 달했다. 하지만 완벽주의자였던 벤츠는 이 차를 대중 앞에 내놓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자신이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자꾸 눈에 띄었기 때문에 출시를 주저했던 것이다. ‘업그레이드’라는 명목으로 창고에서 잠자고 있던 페이턴트 모터바겐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이는 다름 아닌 그의 아내 베르타 벤츠였다.
베르타는 1888년 여름 어느 날 새벽, ‘아이들 데리고 친정에 다녀오겠다’는 쪽지를 벤츠에게 남기고 ‘일’을 저지르고 만다. 우물쭈물하며 발명품을 썩히고 있던 남편의 모습을 보다 못해 직접 페이턴트 모터바겐을 몰고 장거리 주행에 나선 것이다. 친정집이 있는 포츠하임까지는 약 106㎞에 달하는 긴 여정. 베르타는 냉각수가 증발하고, 연료 파이프가 막히고, 브레이크 가죽이 닳아버리는 위기를 임기응변으로 극복하며 친정집에 무사히 도착한다. 이 일로 베르타는 ‘최초의 여성 자동차 운전자’ ‘최초의 장거리 운전자’로 역사에 발자국을 남기게 된다.
뒤늦게 친정에 찾아간 벤츠는 베르타와 모터바겐의 건재한 모습에서 마침내 결심을 굳힌다. ‘여성과 아이가 타고 먼 거리를 주행한 것을 보니 출시해도 되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던 것. 베르타의 역할은 여기서 그친 게 아니었다. 장거리 주행 때 자신이 느꼈던 취약점을 보완하도록 벤츠에게 요청해 향후 ‘자동차’를 만드는 데 반영하도록 했다. 만약 126년 전 베르타의 과감한 ‘내조’가 없었다면 가솔린 자동차 시대의 개막은 아마도 더 늦춰졌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메르세데스-벤츠 웹사이트의 ‘히스토리’(History) 코너는 ‘베르타 벤츠’를 단 한 줄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세상을 움직인 여인’(A woman moves the world)이라고.
이정수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