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린>. 영화가 아니라 16부작 드라마였다면 어땠을까. <다모>를 시작으로 <베토벤 바이러스> <더킹 투하츠> 등 인기 드라마를 만들었던 이재규 PD가 연출한 영화를 두고 이런 평을 내리는 건 잔인하겠지만, <역린>은 영화로는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재규 감독의 영화답게 영상미는 매우 아름답고 수려하다. 이재규식 사극은 스크린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영상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현빈과 정재영, 한지민, 조정석, 박성웅, 조재현, 김성령, 정은채 등 스타 군단의 연기도 수려하다. 그렇지만 한 편의 영화에 담아 두기에는 너무 많은 캐릭터가 등장하고 이야기 구조 역시 단순하다. 다양한 캐릭터의 등장은 호흡이 긴 드라마에 적합해 보이는 데 반해 영화는 135분이라는 러닝타임을 고려해 24시간 동안 벌어진 일로 줄거리를 국한하다보니 벌어진 부조화가 아닐까. 그러다 보니 영화의 큰 줄기는 단순한데 캐릭터 하나하나의 사연은 너무 풍성해서 미처 할 얘기를 다 하지 못하고 끝낸 것처럼 보인다.
영화 <역린>의 홍보 카피부터 이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왕의 암살을 둘러싸고 살아야 하는 자, 죽여야 하는 자, 살려야 하는 자들의 엇갈린 운명의 24시가 시작된다!’가 영화 메인 카피다. 벌써 등장하는 이들이 많다. 살아야 하는 자, 죽여야 하는 자, 살려야 하는 자 등 세 부류의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이야기는 고작 ‘엇갈린 24시’가 전부인데.
물론 다양한 인간 군상을 소재로 해 다양한 캐릭터가 나오는 영화도 있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옴니버스 형태로 각각의 캐릭터마다 이야기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연출이 이뤄진다. 그렇지만 <역린>은 정조 암살 시도라는 분명한 하나의 줄거리를 갖고 있다.
최근 큰 흥행을 한 사극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광해)>와 비교해 보자. <광해>의 경우 이병헌과 류승룡이 큰 틀을 이루고 여기에 한효주와 김인권, 그리고 장광과 심은경 등이 조연이다. 한효주와 김인권이 주조연급이라면 장광과 심은경은 조연으로서의 양념 역할에 충실하다. 영화는 이병헌과 류승룡이 중심을 잡고 한효주와 김인권이 부가적인 이야기 구조를 추가한다. 장광과 심은경은 양념 역할로 극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반면 <역린>은 다르다. 현빈이 중심이긴 하지만 정재영과 조정석, 정은채 등도 주연급에 가까울 만큼 비중이 크다. 여기에 한지민, 박성웅, 조재현, 김성령 등의 비중도 적지 않다. 출연 분량이 그리 많지 않은 서이숙 역시 상궁 역할을 자주 소화한 내공으로 나름의 비중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생각시 역할로 출연한 아역 배우마저 나름의 비중을 차지한다. 이들 캐릭터 하나하나의 사연을 모두 조금씩이나마 담아내려다 보니 ‘먹을거리가 너무 많아 오히려 식욕이 떨어져 버린’ 상황이 되고 말았다.
드라마라면 다양한 캐릭터가 필수적이다. 정조 암살 시도와 같은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16~20회 분량을 이끌고 나가려면 다양한 캐릭터와 그들만의 사연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만 영화의 135분이라는 한정된 러닝타임에 너무 많은 캐릭터와 그들 하나하나의 사연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한계가 너무나 분명하다.
그나마 드라마가 아닌 영화임을 감안해 스토리는 24시간 동안 벌어지는 일로 국한했다. 이는 오히려 메인 스토리를 지나치게 단순화시켰다. 어차피 정조를 둘러싼 드라마틱한 내용은 이미 학교 교실과 기존의 다양한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대부분 알고 있다. 수년 동안 벌어진 일이나 24시간 동안 벌어진 일이나 관객들은 이미 결말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얘기다. 결국 인위적으로 24시간 동안 벌어진 일로 이야기를 국한한 것이 너무 많은 캐릭터의 등장과 서로 대치되며 영화를 애매하게 만들고 말았다.
드라마의 화법은 60~70분 정도의 한 회 분량에 어울린다. 그렇지만 드라마 화법으로 135분 동안 이야기를 끌고 나가다 보니 어느 순간 집중력이 틀어지고 조금은 지루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마치 16~20부작 미니시리즈가 종영한 뒤 이를 2회분으로 압축해서 편집한 뒤 방영하는 느낌이랄까. 오히려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이야기 하나하나를 더 잘 살려내면서 24시간에 국한되지 않고 며칠 내지는 수개월 동안으로 전체 스토리로 확대해 미니시리즈 드라마로 만들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게다가 배우들도 너무 단편적으로 활용했다. 사실 영화를 보며 하나의 캐릭터라도 해당 배우의 기존 이미지와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이는 관객 입장에서 상당한 소득이 된다. <광해>의 김인권이 대표적이다. 코믹 연기의 대가인 김인권이 <광해>에선 우직한 호위무사로 변신해 확실한 연기 변신을 보여줬으며 극의 후반부에선 큰 감동을 선사했다.
그렇지만 <역린>은 대부분 과거에 봤던 그 배우의 모습이 그대로 되풀이 되고 있다. 겉으론 까칠하지만 속내는 따뜻하고, 주위에 상궁과 내시도 두지 않고 혼자 있기를 즐기는 정조의 모습은 <시크릿가든>의 김주원과 닮았다. 게다가 영화 초반부에 생뚱맞게 등장하는 왕의 상반신 탈의 근육 과시 장면은 흥행을 위해 등장하는 여배우의 과잉 노출 장면보다 더 불필요해 보인다. 여자 관객들의 생각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정재영 역시 기존 영화 캐릭터 ‘동치성’으로 대표되는 말수 적지만 우직한 이미지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연기력에 대해선 이번에도 두말할 필요 없이 빼어나지만 새로운 이미지를 엿보긴 힘들다. 기존 작품에선 남성미 강조 등을 위해 수염을 깔끔하게 깎지 않은 모습을 많이 보여준 데 반해 이번에는 내시 역할이라 깔끔하게 수염을 깎은 비주얼은 나름 신선하다. 또한 한지민은 <조선명탐정 : 각시투구꽃의 비밀>에서 선보인 악역 캐릭터를 답습하고 있는데 오히려 연기력은 <조선명탐정> 당시보다 강렬하지 않다.
조정석은 영화 <관상>이나 <건축학개론>에서의 코믹 연기와 달리 진중한 역할을 맡았지만 이재규 감독의 드라마 <더킹 투하츠>에서 이미 한 번 본 모습이다. 박성웅과 김성령, 서이숙 등도 기존에 자주 본 이미지가 되풀이되고 있다. 나름 조재현이 기괴한 캐릭터를 잘 살려내는 명연기를 선보였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에 묻혀버려 아쉬움을 남겼다.
유일하게 눈에 띄는 배우는 정은채다. 그는 극의 반전을 쥐고 있는 신비스런 캐릭터를 적절하게 살려냈다. 정은채는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활력소가 될 만한 신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줬다.
@ 줄거리
앞서 밝혔듯이 줄거리는 단순하다.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섰던 노론 세력은 ‘반역자의 아들’인 정조(현빈 분)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그를 죽이려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조의 할마마마이자 노론의 수장인 정순왕후(한지민 분)가 있다.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정조를 죽이려는 자들, 살아야 하는 정조, 그리고 정조를 살려야 하는 자들이 있다. 1777년 7월 28일 실제 벌어진 정유역변 사건이 바로 이 영화의 주된 스토리로 7월 28일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렇지만 캐릭터 하나하나의 사연을 들여다보면 줄거리는 복잡해진다. 기본적인 구도는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 그대로다.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세력의 심한 견제를 받고 있다. 정순왕후를 주축으로 정조에 대한 암살 시도를 벌일 정도다.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 씨(김성령 분)는 아들 걱정을 하며 정순왕후 측과 맞선다. 또한 정조의 오른팔에 해당되는 홍국역(박성웅 분) 역시 정조를 살려야 하는 중심 세력이다.
여기에 가미된 새로운 캐릭터들이 있다. 우선 노론 세력의 비호를 받으며 고아들을 모아 살수(청부살인업자)를 키워내는 광백(조재현 분)이 있고, 그가 키워낸 조선 최고의 살수인 을수(조정석 분)가 있다. 더 이상 살수의 삶을 살고 싶지 않은 을수는 광백의 거듭된 요구로 하는 수 없이 왕을 죽이는 임무를 맡는다.
뿐만 아니라 광백이 키워낸 살수들 가운데에는 이미 궁안에 들어와서 궁인으로 위장해서 지내고 있는 이들도 있다. 어린 시절 을수와 형제처럼 각별하게 지낸 갑수도 궁 안에 있다. 갑수와 을수의 비극적인 형제애 역시 이 영화의 주된 스토리 라인 가운데 하나다.
또한 상책(정재영 분)이 있다. 정조가 가장 아끼는 내시인 상책은 엄청난 학식을 갖춘 인물로 조정의 고관대작들보다도 학식이 뛰어나다. 상책 역시 홍국영과 함께 정조를 살려야 하는 인물에 해당된다.
궁녀인 월채(정은채 분)는 을수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왕의 여자인 궁녀와 살수와의 관계인 만큼 그들의 만남은 평탄하지 못하다. 월채로 인해 을수는 광백의 왕 암살에 나서게 되는데 월채는 영화 속 다양한 캐릭터와 각각의 인연을 맺으며 서서히 극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비중을 옮겨 온다. 비밀을 감춘 신비로운 캐릭터인 월채는 반전의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이 영화 볼까? 말까?
볼까
1. 현빈의 열성 팬이라면 추천. <시크릿가든>을 남기고 떠난 현빈이 군 복무 이후 처음으로 선보이는 컴백작이다.
2. 영상미가 빼어난 영화를 즐기는 관객이라면 추천. <다모>를 통해 퓨전 사극의 장을 연 이재규 감독은 드라마 PD 시절부터 정평이 나 있던 영상미를 영화에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켰다. 영상미만 놓고 보면 최고 수준의 평점도 아깝지 않다.
3. 충무로의 샛별 정은채의 팬에게도 추천한다. 홍상수 이재용 등 실력파 감독들의 선택을 받으며 충무로 관계자의 시선을 집중시킨 정은채 입장에선 <역린>이 첫 번째 본격적인 상업영화다. 신예지만 쟁쟁한 선배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전혀 밀리지 않는 연기를 선보였다.
말까
1. 기본적으로 재밌는 영화는 아니다. 중반 이후엔 지루하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다. 차라리 16부작 미니시리즈였다면 재밌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하면 16~20부작 미니시리즈를 2부작으로 압축해서 편집한 특집 드라마 같다.
2. 줄거리가 재밌고 결말에 대한 궁금증으로 몰입도가 높은 영화를 선호하는 이들에게도 비추다. 어차피 정조 부임 초기 노론 세력이 정조의 암살을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한 정유역변이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다룬 영화라 대부분의 관객은 결론을 알고 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다만 캐릭터들 각각의 이야기를 얽히고설키게 배치해 줄거리를 풍성하게 만들고 이를 통해 반전의 묘미를 넣은 것은 좋은 시도였지만 등장 캐릭터가 너무 많아서 혼란스럽고 집중력을 흐트러트린다.
3. 현빈의 육체미가 궁금해 보려는 이들에게도 비추다. 현빈의 근육질 몸매는 예고편 등에 등장한 영화 도입부에서 딱 한 번 나올 뿐이다. 베드신이 없는 상황에서 왕의 맨살이 드러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왕이 체력 유지 및 무력 증강을 위해 신하들 몰래 은밀히 운동을 한다는 설정도 다소 황당하다. 물론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는 왕의 빼어난 검술 실력에 타당성을 주기 위한 설정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여성 관객을 위한 서비스 및 홍보를 위한 장면이라는 느낌이 더욱 강하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