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로 정치권에서는 지방선거 연기론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고 있다.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 김한길 대표.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먼저 꺼내는 쪽은 죽는다.”
전계완 매일피앤아이 대표는 정치권이 지방선거 연기를 논의 테이블에 올리는 순간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여야가 내심 지방선거 연기를 원할 수는 있다. 특히 세월호 참사 후 지지율 하락세가 뚜렷한 여권은 더욱 그럴 것이다. 야권도 선거가 미뤄지는 것에 대해 손해 보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더군다나 그동안 정치권에선 지방선거와 재·보선을 통합하자는 주장이 제기돼 왔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민감한 때에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겠느냐. 여야 서로 먼저 얘기해주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지방선거 연기론에 대해 여야는 약속이나 한 듯 일축하고 나섰다.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공식적으로 “지방선거 연기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금태섭 새정치민주연합 대변인도 “당내에서 전혀 논의되는 바 없다. 현 공직선거법을 봤을 때도 천재지변 등에 따라 선거 연기가 가능하다고 돼있는데 지금은 그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것 같다”고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선거 시기의 유·불리를 놓고 갑론을박을 하는 것 자체가 곱지 않게 비칠 수 있다는 점에서 서둘러 진화에 나선 것이다.
건국 이후 전국단위 선거를 연기한 사례는 없다. 한국전쟁 중에도 대통령 선거와 지방의원 선거, 국회의원 보궐선거는 실시됐다. 200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강원도 일대에 큰 산불이 나서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됐고, 당시 삼척시 선거관리위원회가 총선 연기를 검토하기도 했지만 예정대로 치러졌다. 지난 2010년 6월 지방선거 3개월 전 천안함 폭침 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정치권 일각에서 연기론이 대두됐지만 이뤄지진 않았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선거를 연기하기 위해선 법을 바꿔야 하는데 국가적 위기에서 이런 절차를 진행하는 게 오히려 더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이번에도 비슷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내다봤다. 공직선거법 제196조 1항에 따르면 ‘천재지변, 기타 부득이한 사유로 인해 선거를 실시할 수 없거나 실시하지 못한 때에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 있어서는 대통령이, 지방의회 의원 및 지방자치단체장의 선거에 있어서는 관할 선거구 선거관리위원회위원장이 당해 지방자치단체장과 협의해 선거를 연기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정치권에선 세월호 참사가 법에서 언급된 사유에 해당하는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또 지방선거를 연기할 경우 현직 단체장들 임기(6월 30일) 역시 법을 바꿔야 처리할 수 있는 문제다. 더군다나 이러한 법 개정을 적어도 후보자 등록일인 5월 15일까지 끝내야 한다는 점도 연기 가능성을 희박하게 한다.
현실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에선 지방선거 연기에 대한 검토 필요성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고 있다. 특히 기초선거 출사표를 던진 예비후보들 사이에선 이러한 목소리가 높다. 최영일 충주시장·김병수 전주시장 예비후보 등은 “세월호 사고 원인과 책임 규명, 실종자 수색을 어느 정도 마무리할 때까지 지방선거를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지역의 한 구청장 예비후보는 “선거를 하려면 운동을 해야 한다. 유권자들에게 얼굴과 정책을 알려야 할 것 아니냐. 선거를 미루는 게 오히려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것”이라며 “이대로 선거를 치른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몇몇 예비후보들은 중앙당에 여러 차례 지방선거 연기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요청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치권에서도 지방선거 연기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조심스러운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이재광 정치평론가는 “국회가 의지만 있으면 된다. 정치권이 정치적 이해득실이 아니라 진정성을 갖고 국민들을 설득한다면 받아들여지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6월 지방선거 뒤에 7월 재·보선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선거를 통합할 수 있다고 본다”면서 “지방선거 연기를 위한 원포인트 국회를 열어 법 개정 등을 추진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선관위 관계자 역시 “여러 군데서 문의가 들어오긴 했지만 전혀 검토되고 있는 사안은 아니다”라면서도 “여야가 합의하면 시기 조정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정치권이 나서기만 하면 연기가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얘기로 해석된다.
세월호 참사 여파로 지방선거 후보자들은 선거운동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라고 호소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대선 당시 새누리당 유세전.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지방선거 연기론에 대해 일축해 왔던 여권 핵심부는 이러한 물밑 기류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그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모습이다. 수면 위로만 올라와 준다면 시간이 촉박하고 정치적 부담도 크겠지만 검토는 해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들린다. 사상 초유의 대형 참사를 당한 마당에 선거를 치르기가 힘들지 않겠느냐는 게 이들이 내세우는 명분이지만 속내는 선거 참패에 대한 우려가 엿보인다. 세월호 구조 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무능함에 성난 민심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선거에서 대패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동안 여러 악재에도 불구하고 견고하게 유지되던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은 세월호 참사 이후 급격히 빠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박 대통령의 높은 지지율 덕을 톡톡히 봤던 새누리당으로선 선거에 대한 위기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야권에선 일단 여권 일각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연기론에 대해 최대한 신중한 접근을 하는 듯한 스탠스다. 무작정 공세를 취했다간 오히려 역풍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다. 그러나 지방선거 연기에 대해 부정적 견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여권에서 먼저 꺼내기만 해준다면 응해볼 필요는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역시 지방선거 결과의 이해득실을 면밀히 분석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핵심 전략가는 “세월호 참사에 따른 선거 결과를 정치적으로 풀어야 하는 게 도리는 아닌 줄 잘 안다. 그러나 또 안 할 수가 없는 것도 현실 아니냐”고 안타까워했다.
정치권에선 지방선거가 예정대로 실시되면 신뢰를 잃은 여권이 불리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정치 불신으로 인해 투표율이 현저히 낮아질 경우 오히려 여권이 반사이익을 거둘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투표율이 30%대까지 낮아지면 로열티가 강한 보수층 지지를 받는 새누리당이 의외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점쳤다.
또한 새정치연합의 속사정이 녹록지 않다는 것도 지방선거 연기론을 강하게 부정하지 않는 이유로 꼽힌다. 앞서의 새정치연합 전략가는 “조직이 거의 무너진 우리는 기초선거 채비가 거의 되지 않은 상태다. 이마저도 세월호 참사로 더욱 늦어지고 있다. 이대로 선거를 치르면 상대적으로 조직력이 강한 새누리당에 완패할 수 있다”면서 “이런 차원에서 지방선거 연기론을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정치권에선 여야의 몇몇 의원들이 학계와 시민단체 인사들을 접촉하며 지방선거 연기와 관련된 의견들을 주고받는 모습들이 포착됐다. 이를 놓고 여의도 주변에선 모종의 ‘작업’이 이뤄지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지방선거 연기 카드를 선뜻 내밀기 힘든 정치권이 외부의 힘을 빌려 무대 위로 올리려 한다는 것이다. 이미 몇몇 보수단체는 지방선거 연기 촉구를 위한 입장 발표를 준비 중에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새누리당의 한 초선 의원은 “선거 결과 때문에 지방선거를 미룬다고 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겠느냐”면서도 “다만 정치권이 아닌 제3지대에서 먼저 공론화가 되면 우리도 충분히 검토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학계나 시민단체와의 접촉 움직임은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재광 정치평론가는 “(지방선거 연기론 배후에) 정치권이 있다는 것이 드러나면 더 큰 후폭풍이 일 것이다. 또 외부에서 논의가 된 다음 다시 정치권으로 불붙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며 “차라리 정치권이 솔직하게 준비가 덜 됐으니 조금만 미루자고 국민들을 설득하는 게 훨씬 나을 것”고 지적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