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과 변호사업계가 ‘상고기각 결정’ 도입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법원(왼쪽)과 서울지방변호사회 전경. 임준선·구윤성 기자
현행법상 일반인이 소송을 내거나 당하면 3번의 재판을 받을 수 있다. 사안별로 달라지긴 하지만 1심 지방법원, 2심 고등법원, 3심 대법원을 거치는 게 일반적이다. 물론 재판결과에 승복을 하면 한 번의 재판만으로 사건이 끝날 수도 있다. 문제는 1심과 2심에 불복해 대법원까지 가는 사건이 너무 많다는 데 있다. 대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대법원에 접수된 사건은 3만 6000건에 이른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2심 판결이 뒤집히는 경우는 드물다. 민사사건의 경우, 대법원에서 결론이 달라진 사건의 비율은 6% 정도다. 대법원에 접수되는 사건 100건 중 94건은 대법원에서 사건을 심리하는 의미가 없는 셈이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사건 당사자들이 2심 결과에 불복해 대법원으로 가는 ‘상고율’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법원의 불만이 여기서 나온다. 법원은 사건을 선별해 ‘대법관이 맡을 만한 사건’만 대법원에서 처리하고 싶어한다. 대법원이 사회에 미치는 파급력이 큰 사건에 집중하면 그만큼 깊이 있는 판결을 내릴 수 있고, 법원의 영향력도 커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심판이나 행정수도 이전에 위헌심판 등 굵직한 사건을 처리하면서 주목을 받은 이후 최고사법기관으로서의 지위를 헌법재판소에 넘겨주는 게 아니냐는 위기의식도 깔려있다.
실제 대법원은 지난해 통상임금의 범위를 어디까지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한 판결을 내렸지만, 노동자들이 그동안 부당하게 못 받은 임금을 청구할 수 있는 범위에 관해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법조계 안팎으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번 법안에는 대법원이 사건 수를 줄여 이른바 ‘주요사건’에 집중하고 싶다는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앞으로 대법원은 소송 당사자가 2심 판결에 불복한 이유가 적절하지 않은 경우에는 따로 판결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개정안은 지난 17일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했으며 법사위 전체회의와 본회의까지 통과하면 효력을 갖게 된다.
변호사업계는 즉각 반발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대법원의 업무부담 경감이라는 행정편의적 이득에 비해 국민의 기본권인 재판청구권 침해라는 손실이 훨씬 크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 “대법원에 접수되는 사건이 매년 증가하는 것은 국민이 사법부의 판단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이 때문에 대법원의 업무가 가중되는 게 문제라면 대법관 수를 늘리는 등 제도를 개선하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변호사업계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대법원에서 결론이 달라지는 사건이 극소수라고 해도, 사건을 당한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재판결과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낮은 확률이라고 해도 대법원 판단을 받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변호사들이 대법관 수를 늘려서라도 대법원 사건 수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1년에 3만 건이 넘는 사건이 대법원으로 가고 있는 상황에서 대법원이 소수의 사건에만 집중한다면 그만큼 변호사업계의 영향력은 물론 수입에도 타격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소송 의뢰인이 변호사와 계약할 때는 최종 결과를 놓고 각종 보수를 지급하도록 하는 경우도 있지만, 1심과 2심, 3심별로 보수를 차등해 지급하도록 계약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게 현실이다. 로스쿨 도입 등으로 변호사 수가 해마다 증가하는 상황에서 변호사가 대리하는 영역이 줄어들게 된다는 점도 현실적인 반대논리로 작용하고 있다.
변호사업계는 3심까지 가는 길을 그대로 열어두고 현재 14명의 대법관을 20명으로 증원하는 방안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현재 대법원은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맡은 대법관을 제외한 12명의 대법관이 4인 1조로 3개의 재판부를 구성해 사건을 부별로 처리하고 있다. 대법관을 20명으로 증원하고,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제외한 18명의 대법관을 3인 1조로 6개의 재판부를 구성하면 대법원의 사건 부담이 지금의 절반으로 줄어들 수 있다는 게 변호사업계의 주장이다.
당연히 대법원은 대법관 수를 증원하는 데 반대하고 있다. 표면상으로는 대법원이 일관된 법률 이론을 펼치기 힘들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고 있다. 대법원이 최고법원으로서 기능을 제대로 하려면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3명이 한 사건을 함께 처리하는 ‘전원합의체’ 판결이 활성화돼야 하는데, 대법관 수가 너무 많아지면 의견통일이 쉽지 않아 대법관 전원이 함께 사건을 처리하는 데 어려움이 생긴다는 게 주요 논리다.
대법원은 전원합의가 가능한 대법관의 최대 인원수를 15명으로 잡고 있다. 하지만 법조계에서는 대법원이 대법관 수를 늘리지 않으려는 게 대법관의 지위 격하를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대법관 전원이 함께 처리하는 사건 수가 1년에 20건이 채 안되는데, 이것을 명분으로 나머지 3만 건이 넘는 사건을 줄이자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변호사업계에서는 대법원이 사건 수가 많다는 것을 이유로 판결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실제 대법원 판결문을 보면 10문장이 채 안 되는 짧은 내용으로 ‘상고를 기각한다’고 판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서울지역의 한 변호사는 “변호사는 의뢰인의 청구가 기각되더라도 어떤 사유에 의한 것인지를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하는데, 대법원이 판결을 내리면서 이유를 제대로 판시하지 않아 의뢰인에게 설명할 길이 없어지고 변호사만 무능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게 된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번에 발의된 법안은 대법원이 ‘판결’이 아닌 ‘결정’으로 사건당사자의 청구를 기각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변호사는 “법안이 통과되면 사건 당사자가 이유도 모른 채 시간과 비용을 허비하게 되는 사례가 늘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 관계자는 “대법원은 사실심이 아닌 법률심이기 때문에 사실관계에 대한 부분을 일일이 대법원이 검토하고 2심 판결이 타당하다는 이유를 설명할 이유는 없다”고 말했다.
현재 법원은 1, 2심에서 당사자의 변론을 통해 사실관계와 증거를 확정하고, 대법원은 이미 확정된 사실관계를 건드리지 않는 범위에서 2심이 잘못된 법 논리를 구성한 게 있는지만을 검토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선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