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2일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이 사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영·호남 인사들의 갈등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자칫 이 같은 싸움이 표면화할 경우 엄청난 파문이 일 수 있지만 청와대가 서둘러 수습하면서 일단 총선 분위기에 휩쓸려 당분간은 잠복기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각에선 벌써부터 정권 내부의 권력 갈등이 가시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시각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12일 전격 사퇴한, ‘부산파’의 대부격인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은 당초 4월 총선 때까지는 자리를 지킬 작정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도 그같이 얘기했고 노 대통령도 이미 받아들인 상태였다.
노 대통령이 지난달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이미 “문 수석은 이번 총선에 나가지 않고 계속 그냥 간다”고 공개적으로 정리를 한 상태였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의 전언이다.
그러던 차에 1월 말에 터져나온 민경찬 펀드 조성 파문 와중에 호남 출신의 노 대통령 최측근 인사 중 한 명인 염동연 전 정무특보가 문 수석을 향해 “혼자 고상한 척하지 말라”면서 직격탄을 날렸다.
비록 강금실 법무장관, 정찬용 인사수석 등과 싸잡아 비판했지만 당시 염 전 특보의 타깃은 문 전 수석이었다는 게 당 안팎의 중론이다. 문 수석의 불출마 입장을 노 대통령이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있던 청와대 주변에선 당시 염 전 특보가 ‘헛발질’을 했다는 얘기가 많았다.
이 같은 공개적인 ‘전투’와 별개로 최근 청와대 안팎에선 호남 출신인 정 수석을 겨냥한 영남 출신 인사들의 ‘정찬용 출마설’ 흘리기가 이어졌다.
부산파로 불리는 한 인사는 최근 사석에서 기자들에게 “정 수석이 애초부터 총선 출마에 생각이 있었다”면서 “작년 여름부터 그런 생각을 주변에 피력했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 수석이 그동안 호남 사람들을 많이 챙겨주기도 했기 때문에 광주 어느 지역구에 나가도 당선된다고 하더라”라고 덧붙였다.
반대로 호남 출신의 한 청와대 인사는 지난주 몇몇 기자들에게 “문 수석이 상당히 심경의 변화가 있는 것 같다”면서 “당초 정치는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이 요즘엔 ‘차라리 출마해서 떨어져버렸으면 좋겠다’고 하더라”라고 문 수석의 출마 가능성을 내비쳤다. 실제로 이런 얘기들이 일부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문 수석은 민정수석실 직원들과 저녁 식사를 함께하면서 “공직사퇴 시한까지 열흘만 버티면 된다”면서 불출마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다음날 일부 언론에서 자신의 출마 가능성을 보도한 데 대해 “이젠 출마 얘기만 나오면 짜증이 난다”고 화를 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 문재인 수석을 공격한 염동연 전 특보(왼쪽)와 청와대의 대표적 호남 출신인 정찬용 인사수석. | ||
노 대통령의 새로운 인사 스타일에 따라 정 수석은 인사 추천이 주 업무이고 문 수석은 추천된 인사에 대한 검증이 주 업무다. 영·호남 출신 인사들을 인사의 중요한 포스트에 각각 포진시켜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하겠다는 발상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각자의 출신지 인사들이 기용되는 데 있어 해당 지역 인사들로선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인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여당인 열린우리당 안팎에서 영남 출신 인사들은 정 수석에 대해, 호남 출신들은 문 수석에 대해 상당한 불만을 반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 같은 ‘밀어내기’와는 반대로 두 사람의 출마 얘기가 나오면 호남 출신들은 정 수석의 출마를 극구 만류했고 문 수석에 대해선 열린우리당과 부산 지역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청와대 부산파가 앞장서 모두 말렸다. 호남 출신 한 전직 비서관은 “정 수석이라도 청와대에 남아 있어야 그나마 숨통을 틀 수 있다”면서 바쁜 선거 준비 와중에도 정 수석을 만나 출마를 막았다.
반면 청와대 내 부산파 한 인사는 “안상영 시장의 자살 사건도 있는데 문 수석이 출마할 경우 오히려 역풍이 불 수도 있어 문 수석 출마를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고 했었다.
이런 출신 지역간 충돌에 이어 문 수석이 13일 예정보다 앞당겨 사퇴 회견을 하게 된 데는 지금은 몰락한 것으로 보이는 ‘서울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듯하다. 서울파는 이광재 전 국정상황실장을 필두로 한 386 출신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당초 지난 9일 노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했던 문 전 수석은 노 대통령의 허락이 떨어지면 공직사퇴 시한인 15일이 지나서 이 같은 사실을 언론에 알릴 예정이었다. 게다가 노 대통령의 만류가 계속되면서 뜻을 접을 수도 있다는 판단에 민정수석실 관계자들은 12일 오전까지도 문 수석의 사의 표명 사실을 함구했었다.
그러나 12일 일부 신문에 문 수석의 거취 문제를 다룬 기사가 실리면서 문 수석의 사퇴는 기정사실화돼버렸고, 문 수석은 이날 오전 노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오후 3시에 곧바로 사퇴 기자회견을 해버렸다.
물론 이 과정에서 유인태 정무수석 등이 문 수석에게 “이왕 나갈 거면 13일에 함께하자”고 권유한 것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결정적으로 문 수석의 사퇴를 기정사실화하기 위해 누군가 의도적으로 언론에 흘렸다는 게 ‘부산파’의 시각인 듯하다.
이들은 이미 ‘용의자’(?)까지 파악한 듯했다. 이광재 전 실장 사퇴 이후 몰락한 것으로 알려진 ‘서울파’ 중 한 명인 이 ‘용의자’에 대해 ‘부산파’ 한 인사는 13일 “우리는 아마추어라 일을 잘 못했던 것 같은데 386 출신이라는 사람이 정치를 꽤 잘하는 것 같다”며 ‘용의자’의 실명까지 거론했다. 우회적으로 불쾌한 심경을 드러낸 것이다. 12일 오전까지도 이들은 문 수석의 사퇴를 만류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울파의 의도적인 언론플레이가 문 수석 사퇴에 쐐기를 박았다는 심증을 갖고 있는 듯했다.
▲ 갈등설을 낳은 고영구 국정원장(왼쪽)과 서동만 전 기조실장. | ||
청와대는 “국정원 문제는 모르는 게 좋다”면서 경질 이유를 감추고 있지만 청와대 안팎에선 이런 저런 얘기들이 흘러나오고 있다. 1차적으론 개혁의 속도를 놓고 벌어진 고영구 원장과 서 전 실장 간 충돌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결국 인사 문제가 결정적으로 걸려 있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서 전 실장은 국정원의 근본적인 개혁을 위해 파격적인 인사 쇄신을 주장했고 고 원장은 화합형 인사를 강조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충돌이 국정원내 소장파와 노장파 간 충돌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자 청와대는 서둘러 서 전 실장을 경질하는 것으로 사태를 원만하게 매듭지으려 했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국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임명을 강행할 정도로 신뢰가 두터웠던 서 전 실장을 손댄 것은 서 전 실장이 노 대통령과 코드가 맞긴 하지만 조직의 수장인 고 원장을 교체할 경우 파장이 상상 외로 커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인 듯하다.
그러나 이 같은 조직 내부 개혁 속도를 둘러싼 갈등과 별개로 청와대 안팎에선 국정원 내 영·호남 출신간 충돌로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부산 출신인 고 원장과 호남 출신인 서 전 실장이 두 지역 출신에 대한 인사 문제로 충돌을 빚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여기에 국정원과의 연결 통로인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부산파’로 채워져 있다는 점도 ‘고 원장의 승리’에 일조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
물론 청와대와 국정원측은 이 같은 시각에 대해 펄쩍 뛴다. 청와대 관계자는 “영·호남간 충돌이니 뭐니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라며 “오래전 일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술을 좋아하는 서 전 실장이 현재로선 알기 힘든 ‘사고’를 쳤을 가능성까지 거론되기도 했지만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은 그럴 가능성을 일축하고 있다. 외교안보연구원장 기용설이 나도는 서 전 실장은 아직까지 기자들의 전화를 받지 않고 있다.
일각에선 서 전 실장이 지난해 당시 이광재 전 실장과 보고 체계 문제를 놓고 한 차례 충돌을 벌인 적이 있다는 설과 함께 이 전 실장을 의심하는 눈초리도 있다. 그러나 이 전 실장은 특검조사, 청문회 증인 출석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어 이 같은 관측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이 전 실장과의 충돌 여부에 대해서도 두 사람 모두 부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같은 권력 내부 갈등은 아직 구체적으로 가시화된 싸움은 아니다. 당사자들은 한결같이 이 같은 시각에 대해 “말도 안된다”며 극구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구도’ 타파를 주창하면서 정치개혁을 위해 자신의 대선자금 문제까지 검찰 수사에 맡긴 노 대통령의 참여정부 핵심 내부에서 출신지 등을 둘러싸고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지는 인상을 내비치고 있다는 것은 진위가 어떻든 상당히 아이러니컬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조은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