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수사관이 증거물에서 혈흔을 채취하고 있다. 대검찰청 산하에 있는 ‘디지털 포렌식 센터’는 과학적 수사 기법으로 각종 미제사건을 밝혀내는 데 일조하고 있다. 원안은 날아간 데이터베이스를 복구하는 모습. 연합뉴스
검찰은 중국대사관이 ‘검찰이 제출한 출입경기록은 위조된 것’이라는 답변을 했을 때만 해도 서류가 위조됐다는 점에 대해 유보적이었다. ‘위조’라는 개념이 실제 문서가 조작됐다는 의미 외에도 작성 권한 없는 자가 제대로 된 문서를 작성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검찰이 변호인 측 주장대로 문서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진상조사에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은 대검찰청 디지털 포렌식 센터의 문서감정 결과가 나온 이후였다.
‘디지털 포렌식(digital forensics)’은 일반인에게 매우 생소한 분야다. 전자증거물을 사법기관에 제출하기 위해 휴대폰, PDA, PC, 서버 등에서 데이터를 수집 분석하는 디지털수사과정을 뜻한다. 꾸준한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외화로 인해 미국 ‘CSI 과학수사대’가 잘 알려져 있듯이, 우리나라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과 대검 디지털 포렌식 센터(DFC)가 과학수사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국과수는 주로 경찰 수사 단계의 과학수사 지원을 맡고 부검 등 법의학 분야에 강점을 갖고 있는 반면 DFC는 검찰 수사를 지원하는 역할을 하며 디지털 범죄 증거 분석 분야에서 강점을 지닌다는 차이가 있다.
DFC는 지난 2008년 검찰이 창설 60주년을 맞아 야심차게 개관한 시설이다. 서초동 대검 청사 내에 지상 6층 지하 1층 연면적 7884㎡ 규모로 자리 잡았으며, 144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검찰의 압수수색 소식에 발 빠른 지원을 나서는 장비 역시 DFC에서 나온다. DFC가 보유하고 있는 분석장비는 현장에 압수수색을 나갔을 때 하드디스크의 자료를 원형 그대로 파일로 다운받는 데 유용하다. 과거 삭제된 자료를 복원하는 것도 가능하며, ‘디스크 분석팀’이 이를 분석해 증거로 사용할 만한 내용을 찾아낸다.
문서감식을 하는 모습. 유우성 씨 사건에 대한 증거조작 여부를 가릴 때에도 문서감정실의 감정결과가 주요하게 작용했다.
이른바 ‘BBK 사건’ 때 진가를 확인했던 문서감정실 내 문서광학분석실은 훼손된 문자나 문서위조, 잠재지문현출 등의 작업이 이뤄지는 곳이다. 육안으로 구분이 어려운 문서라도 감정 장비를 통과하는 순간 위조여부가 가려진다. 수표의 콤마(,) 부분에 동그라미를 덧붙여 액수를 위조하고 ‘nine dollar’에 ‘ty’를 붙여 ‘ninety dollar’로 바꿨을 경우 파장변조를 통해 보면 콤마를 숫자 ‘0’으로 덧씌우고 알파벳도 바꾼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볼펜의 성분과 기입한 시간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글씨 위에 까맣게 덧칠했을 경우도 파장변조를 통해 보면 원본 글자가 명확히 드러난다.
유우성 씨에 대한 증거조작 여부를 가릴 때에도 문서감정실의 감정결과가 주요하게 작용했다. DFC는 중국 싼허변방검사참이 ‘출입경 기록이 정상적으로 발급됐다’고 답변한 문서가 위조된 사실을 밝혀냈다.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정도였지만, 문서에 찍힌 도장이 정상적인 것과 미세하게 모양이 달랐던 것이다.
유괴범이나 협박범죄에서 음성을 식별하는 부서도 중요하다. 음성식별과 음질개선은 물론이고 말하는 이의 교육수준, 성격, 언어습관 등을 가늠하는 ‘화자프로파일링’도 가능하다. 라디오 스튜디오처럼 구성된 녹음실에서는 피의자를 불러와 협박범과 동일인인지 여부를 구분할 뿐만 아니라 성대모사라도 본래의 음성과 흉내 낸 음성을 순식간에 구분하는 비법을 보유하고 있다.
DNA 포렌식 연구실은 각종 성범죄나 폭행사건 등 강력범죄를 해결하는 데 큰 역할을 맡고 있는 곳이다. ‘유영철 연쇄살인사건’에서 유전자 감식을 통해 새롭고 결정적인 증거를 찾는 데 공을 세우며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했다. DNA 시료처리실과 DNA 추출실은 혈흔, 혈액형, 정액·타액흔 등 정밀한 시료채취로 과학수사에 기여하고 있다.
환자맞춤형 줄기세포가 없다는 사실과 줄기세포가 ‘섞어 심기’된 사실을 밝혀내 과학계의 도덕적 불감증에 경종을 울린 ‘황우석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DNA 분석실은 DNA 프로필을 분석한 뒤 나오는 숫자 코드로 동일인 여부를 판단하며, 가족관계, 친자여부 확인이 가능하다. 단춧구멍 하나만한 핏방울이면 분석이 가능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경찰 초동수사 단계에서 지원을 한다면 대검 DNA 분석팀은 검찰 조사 등을 통해 추가 분석이 필요할 경우 투입되며, 국과수와 상호 발전적인 보완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DFC는 검찰의 기소 단계에서 요청된 마약 성분, 지문, 감정 등 여러 수사 분석 지원을 맡고 있다. 왼쪽부터 DNA 검출, 법화학 감정, 화재수사 과정.
심리분석실은 거짓말 탐지기 분석을 한다. 고성능 카메라로 미세한 표정 변화와 안면근육 변화 등을 탐지하며, 통합 심리분석 자료를 판사에게 건네 시체 없는 살인 사건 등에서 판사 심증 형성에 중대한 자료를 만들고 있다. 최근 검찰이 3000만 원짜리 보험사기로 기소했던 시체 없는 살인사건에서 사기죄임에도 징역 7년의 중형이 선고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성범죄처럼 진술에 의존하는 비중이 큰 사건에서 진술의 신빙성을 검증하는 ‘진술분석관’들은 기계가 검증하지 못하는 부분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가령 아동 성범죄에서 어린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들은 내용과 자신이 실제로 겪은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진술하는 경우가 많다. 일선 검찰청에서는 아동이나 장애인이 성범죄 피해에 대한 진술을 하더라도 그 내용이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지 가려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대부분 심리학 박사학위를 가지고 프로파일러 등 범죄심리학에 관련된 실무경험을 쌓은 진술분석관들은 이러한 진술내용 중 허위인 것과 신빙성이 있는 내용을 구분해 법원에 감정서를 제출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진술이 일관성이 없어서 범죄자를 가려내지 못하는 일을 방지하게 되는 것은 물론, 반대로 억울하게 범인으로 지목됐다가 진술내용이 허위인 것이 드러나 오명을 벗는 일도 있다.
이밖에 ‘영상분석실’은 폐쇄회로(CC)TV 등 화질이 낮은 화면이라도 특수 기법을 통해 한 장면의 특정 프레임에 자료를 계속 중첩시켜 영상을 선명하게 하는 작업을 거쳐 범인의 얼굴을 식별, 몽타주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또 자동차 번호판을 식별하거나 길이계측을 통해 수배자의 키를 정확히 산출해내는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다.
마약분석실은 소변, 모발 감정 등을 통해 마약 복용 여부를 감별해 내고 있다. 소변 검사는 1나노그램의 마약성분까지 감식이 가능하며 1주일 이내의 투약 여부를 파악할 수 있다. 마약의 화학적·물리적 성격을 일컫는 ‘마약지문’ 감정도 실시한다. 마약지문의 경우 국내에서 압수된 600점 이상의 마약지문을 보유하고 있다. 대마흡연자의 모발에서 흡입여부를 검증하는 장비도 있다. 미국 독일에 이어 우리나라가 3번째로 도입했다.
이선영 언론인
DNA 감식기술의 현재 감식 속도 미국 앞질러… 데이터 운영 논란은 여전 영화 <살인의 추억>은 화성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화에서 비오는 날, 빨간 옷을 입은 여성들이 줄줄이 성폭행을 당한 채 시신으로 발견되고,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통밥’으로 수사하는 구식 형사와 ‘기록은 거짓말하지 않는다’며 논리정연한 수사를 주장하는 형사의 대립구도가 이어진다. 1980년대 우리나라 과학 수사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 영화 <살인의 추억>. 이 영화는 1980년대 우리나라 과학수사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경찰은 연쇄살인범의 유력한 용의자를 지목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어 체포하지 못하고 기나긴 잠복근무를 이어가게 된다. 경찰이 피해자 속옷에서 소량의 정액을 검출해내지만, 우리나라에 DNA 감식기술이 없던 때라 미국에 감식을 의뢰해 결과를 받아보는 데 수개월 이상이 걸렸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미국으로부터 ‘검출된 DNA가 용의자의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감정결과가 날아오면서 용의자를 놓아줄 수밖에 없는 허무한 결말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다르다. 한국은 2010년부터 ‘DNA 신원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시행돼 검찰과 경찰이 DB를 운영 중이다. DNA를 감식해내는 속도는 오히려 미국을 앞서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 DNA감식을 하면 3~5일이면 결과가 나오는데, 정확성이 높지만 길게는 2년까지 걸리는 미국보다 우리가 훨씬 빠른 편”이라고 말했다. 혈흔이나 정액이 아닌 피의자가 만진 물건의 지문을 통해서도 DNA를 검출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의 식별 기술은 상당 수준에 올라와 있다. 검찰이 지난 3년여간 범죄자 DNA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해 진짜 범인을 찾아낸 미해결 사건은 1266건에 이른다. 사건 유형별로는 절도가 67%(850건)로 가장 많고 성폭력 18%(232건), 강도 4%(46건), 살인 0.3%(5건) 등의 순이다. 하지만 범죄자의 DNA데이터를 운영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논란이 있다. 신체정보인 DNA시료를 채취하려면 법원의 영장이 있어야 하는데, 실무에서 이런 절차가 잘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다. 실례로 최근 경기도에서 있었던 한 살인사건에서 지역주민들은 대부분 검찰과 경찰의 DNA시료 채취를 거부하지 못했다. 법적으로는 시료 채취를 거부할 수 있고, 거부한 경우 법원이 구체적인 필요성을 따져 영장을 발부한 다음에야 시료를 강제 채취할 수 있지만 시료 채취를 거부하는 순간 범인으로 몰릴 수 있다는 심리적 압박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DNA 시료를 의무적으로 제출하게 돼 있는 수형자의 경우도 인권침해 논란이 있다. 수형자들은 이미 형벌을 받은 신분이기 때문에 DNA채취가 이중처벌의 소지가 있고, 다시 범죄를 저지를 위험에 관계없이 DNA를 채취해 관리하는 것은 이미 부당하게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현재 ‘DNA 신원확인 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대해서는 이 법률이 위헌이라는 주장에 따라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이 청구돼 사건이 계류중이다. 만일 이 법률에 대해 위헌결정이 내려지면 DNA데이터베이스를 운영할 법적 근거가 사라져 DNA감식을 통한 수사에는 큰 타격이 불가피하게 된다. 헌법재판소는 이런 중요성을 감안해 법학자와 의학자 등 전문가를 불러 공개변론을 열기도 했다. [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