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세븐 데이즈’ 스틸컷.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지인의 소개로 만난 강 씨와 A 씨는 지난해 6월부터 교제를 시작했다. 강 씨는 A 씨에게 자신이 모 일간지 기자이며 변호사 업무를 병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전문직 남성임을 강조해 A 씨의 환심을 사려했던 강 씨의 거짓말이었다.
강 씨의 이중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기자와 변호사 업무와는 거리가 먼 강 씨의 ‘교양 없는’ 언행과 한가한 하루일과를 지켜본 A 씨는 서서히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A 씨는 지인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남자친구 강 씨가 사실은 일정한 직업이 없으며 전과까지 있다는 것. 이에 A 씨는 고민 끝에 올해 1월 강 씨에게 만남을 정리하자며 결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별통보를 받은 강 씨는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A 씨를 무작정 괴롭히기 시작한 것. 강 씨는 헤어지자는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A 씨에게 집요하게 연락을 했다. 그러나 수차례 연락에도 A 씨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자 강 씨는 지난 4월 15일 새벽 2시 경기도 일산 A 씨의 집 앞으로 찾아가 ‘한 번만 만나주면 헤어져주겠다’고 속여 기어이 A 씨를 집 앞으로 불러냈다.
그러나 집 앞에서 A 씨를 마주한 강 씨는 돌변했다. 강 씨는 A 씨를 붙잡고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가족을 모두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평소 A 씨의 가족과도 잘 알고 지냈던 강 씨의 협박은 A 씨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강 씨는 그 길로 A 씨를 납치해 부산으로 향했다.
강 씨는 무작정 도착한 부산의 한 모텔에서 A 씨를 성폭행했다. 다음 날인 16일 강 씨는 A 씨를 끌고 강원도 속초의 한 모텔로 이동했다. 강 씨는 이곳에서 또 한 차례 A 씨를 성폭행했다. 그리고 강 씨는 또 다시 경기도 일산의 한 모델로 A 씨를 데려가 성폭행하고 감금했다. 강 씨는 A 씨가 잠든 틈을 타 A 씨의 옷을 벗기고 나체를 촬영해 이를 A 씨를 협박하는 데 이용했다.
강 씨와 A 씨는 일산 부산 속초 그리고 다시 일산으로 이동하는 동안 대중교통만을 이용했다. 그렇다면 왜 A 씨는 이동 중에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을까. 이번 사건을 수사 중인 일산경찰서 관계자는 “A 씨가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면서도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던 이유는 강 씨가 A 씨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강 씨는 A 씨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없도록 핸드폰으로 찍어놓은 A 씨의 나체 사진을 빌미로 ‘말을 듣지 않거나 누군가에게 알리면 사진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했다”고 말했다. A 씨는 자신의 동영상과 나체사진을 유포하겠다는 강 씨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강 씨는 납치 5일째인 지난 19일부터 A 씨를 경기도 일산 자신의 집에 감금했다. 강 씨는 부모님과 함께 거주했지만 A 씨를 자신의 방에 가두고 ‘밖에 나오거나 소리를 내면 죽이겠다’는 말로 협박해 부모님의 눈을 따돌렸다. 강 씨는 이곳에서 A 씨가 다른 남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목을 졸라 살해하려고도 했다.
강 씨가 A 씨를 본인의 집에 감금한 기간은 5일가량이었다. 일각에서는 강 씨와 함께 산다는 강 씨의 부모님이 A 씨의 감금 사실을 5일 동안이나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미필적 고의로 인한 공범일 가능성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A 씨의 집에서 A 씨의 실종신고를 한 것도 이 즈음이다. A 씨의 부모님은 지난 4월 23일 전 남자친구가 의심이 된다며 A 씨의 실종신고를 했다. 경찰관계자는 “A 씨가 납치된 후 부모님께 여행 중이라는 카톡을 남겼다고 한다. A 씨가 작성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강 씨를 만난다며 나갔던 딸이 여행 중이라니 기다렸던 것 같다. 이후 딸이 연락이 되질 않자 강 씨를 의심한 것”이라고 말했다.
A 씨 아버지의 실종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4월 23일 오후 10시 40분께 일산 강 씨의 집을 방문했다. 경찰이 강 씨의 집 앞에서 현관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살려 달라’고 소리치는 A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집에 있다 뒤늦게 상황을 알게 된 강 씨의 어머니는 A 씨가 아들 방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현관문을 열려 했지만 강 씨는 흉기로 문을 열려고 하는 어머니를 위협하며 경찰과 대치했다.
강 씨와 경찰의 대치는 4시간가량 지속됐다. 어머니와 A 씨를 인질로 잡은 강 씨는 경찰에게 “집 앞에서 돌아가면 A 씨를 놓아 주겠다”고 요구했다. 결국 경찰은 24일 새벽 3시 15분께 경찰 특공대를 투입해 강 씨를 검거했다. 경찰은 강 씨에 대해 살인미수와 특수감금, 강간 등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한 상태다.
경찰 관계자는 “A 씨가 구출된 이후에도 심신이 많이 미약해진 상태다. 강 씨가 집과 가족을 모두 알고 있어 위해를 가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다고 한다”며 “기자와 변호사를 사칭했던 강 씨는 특수강도 등 전과 4범의 무직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말했다.
전과 4범의 엽기남친은 여자친구의 이별통보에 숨은 범죄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 또 다시 철창으로 향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급증하는 이별범죄 ‘너 죽고 나 죽자’ 극단 선택 지난해 12월 고려대학교 인근 한 원룸에서 여대생이 숨진 채 발견됐다. 목에는 핸드폰 충전기 선이 감겨있는 상태였다. 부검에서도 자살인지, 타살인지 결론이 나오지 않으면서 사건은 점점 미궁으로 빠지는 듯했다. 그러나 한 달 후 피해자 여성의 손톱에서 한 남성의 DNA가 발견되면서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조사 결과 이 DNA는 사망한 여학생과 1년간 교제했다 헤어진 전 남자친구 이 아무개 씨(20)의 것이었다. 이 씨가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시 만나줄 것을 재차 요구하다 사달이 난 것이다. 이 씨는 5월 16일 선고공판을 앞두고 있다. 지난 4월 18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한 공원에서는 나무에 목을 맨 채 숨져 있는 한 남성이 지나가던 행인에게 발견됐다. 사망한 남성은 지난 4월 14일 성균관대 도서관 열람실에서 손 아무개 씨(여·26) 책상 주변에 수은을 뿌리고 달아난 혐의로 경찰의 추적을 받아온 손 씨의 전 남자친구 조 아무개 씨(28)였다. 조 씨 또한 손 씨의 이별 통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손 씨 주변을 배회하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수은 테러의 용의자인 조 씨가 사망하면서 공소권 없음으로 내사를 종결한 상태다. 최근 들어 이별을 통보한 연인을 대상으로 한 ‘이별 범죄’가 늘고 있다. 이별범죄는 평소에는 별 탈 없이 지내던 연인이 ‘이별’이 기폭제가 되어 폭력이나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에 노출되는 것을 뜻한다. 이별 범죄는 주로 이별을 요구한 여성과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성 사이에서 발생한다. 그렇다고 해서 범죄 발생의 원인을 여성의 ‘이별요구’로만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한국여성의전화 신상희 인권정책팀장은 “결국 이별범죄가 일어나는 것은 시작부터 그 관계가 서로에 대한 존중과 원활한 의사소통이 부재했기 때문”이라며 “여성의 이별 요구만이 범죄의 원인인 양 말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연이 부른 강력범죄가 잇따르면서 ‘아름다운 이별’보다는 ‘안전한 이별’이 더 주목받고 있는 요즘이다. 무엇보다 스토킹이나 폭력과 같은 이별범죄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는 단호하게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이 우선이다. 전화를 받지 않거나 전화번호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의사표시를 할 수 있지만 상대방에게 ‘더 이상 연락하지 말라’는 요구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 팀장은 “가해자는 자신의 행동이 연애의 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분명한 것은 스토킹은 연애의 일부분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피해자가 단호한 태도로 대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