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울릉도 간첩단 사건을 다른 연극 <상처꽃>의 장면들. 김희중 전 프로 9단은 물론 매회 다른 카메오가 판사로 등장한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2006년 피의자들은 ‘진실화해위원회’에 진상 규명을 신청했다. 2010년 위원회는 진상규명을 결정했다. 올해 2월 5명이 무죄로 밝혀졌다. ‘무죄’는 이어지고 있다. 지금까지 19명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사건은 조작이었음이 드러났다. ‘울릉도 간첩단’이란 건 없었다.
김근태기념치유센터 ‘숨’,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후원으로 ‘마당극 연출 1세대, 창작판소리 명창 임진택 예술감독이 지휘봉을 잡았고 최창남 목사의 원작 <울릉도 1974>를 ‘극단 길라잡이’의 대표 양장순 작가가 극본으로 만들었다. 연출은 일본에서 ‘극단 신주쿠양산박’의 대표로 활동하고 있는 재일동포 김수진 감독이 맡았다. 1971~1974년생들인 강왕수 고기혁 김효배 배정미 성형진 손경원 정연심 조승욱(가나다 순) 등 8명의 배우가 40년 전 자신들이 갓 태어난 무렵에 있었던 사법의 만행을 온몸의 열연으로 고발한다.
연극은, 이제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된 피의자들이 재판정에서 재심결정을 받는 것으로 시작하고, 이들이 어떻게 치유 받을 수 있는지, 이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 피해자들과 우리 모두 잊거나 묻거나 감추어선 안 되고, 기억하고 토해내고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묻고 답하며 진행한다. 더럽고 아프고 어둡고 무겁더라도 그게 치유가 아니겠느냐고 묻고, 그래야 상처가 꽃이 된다고 답한다. 그게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니 그래야 한다고 합창한다.
주연이 따로 없다. 8명의 역할과 비중이 균등하다. 마당극의 명장 임진택 감독의 스타일이다. 치유하는 사람, 치유 받는 사람이 다 주인공이며 상처가 치유보다 먼저니 상처를 만든 시대와 그 시대의 부역자들도 악역이지만, 주인공이다. 배우와 관객이 같이 울었다. 1990년대에 태어나 1974년을 물들였던 민청련, 제2의 인혁당, 울릉도 같은 것들을 알 리 없는 바둑 아가씨들도 많이 울었다. 먼저 본 사람들도 울었다고 한다. ‘서사치유연극 상처꽃’을 본 사람들은 인터넷에서도 울고들 있다.
김희중 9단은 배석판사의 역할이다. 재판정의 ‘장면1’이 끝난 후, 연극의 변호사 겸 해설자가 카메오 판사를 소개했다. 부장판사는 조성우 ‘민화협’ 상임의장. 김 9단의 고교 선배로 바둑 실력 아마5단, 바둑TV의 고교동문전에 팀 단장으로 참가한다. ‘도시의 농부들’ 이사장이기도 한 조 의장은 임 감독과 교분이 깊다. 변호사 겸 해설자가 김 9단을 가리키며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프로기사 9단이셨고, 속기의 달인으로 1974년 무렵에는 ‘기왕’ 타이틀 보유자로 한 시대를 풍미한 분”이라고 소개하자 관람석에서 박수갈채가 터졌다.
연극은 총 60회 공연인데, 매회 다른 카메오가 판사로 등장한다. 1회 함세웅 신부, 2회 인재근 의원(김근태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파리의 택시 운전사’ 홍세화 <말과 활> 편집인,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 문성근 ‘시민문화학교대표’,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유인태 의원, 신낙균 전 문광부 장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유홍준 교수 등이 출연했고, 앞으로 나올 사람으로는 문규현 신부, 배우 권해효, 김정현 서울문화재단 이사장, 연극의 원작자 최창남 목사 등이 보인다.
감독-스태프-출연진과 바둑 식구들이 뒤풀이를 가졌다. 판사로 나온 사람들이 “카메오가 아니라 진짜 배우인 줄 알았다, 부장판사 조 의장은 목소리가 중후해 부장판사로 제격이었다”고들 하는 말에 조 의장은 “내 이름이 성우 아니냐”면서 파안대소했다. 6척의 김희중 9단은 “법복이 잘 어울린다. 지금이라도 고시공부를 해 보면 어떠냐”는 말을 들었다. 김 9단, “아니, 이 나이에….”
또 한 사람의 배석판사는 1975년 대학생 간첩 사건에 연루되어 30여 년 옥살이를 하다가 무죄로 풀려난 S 씨. “나는 그때 의대생이었어요. 공부하기도 바빴는데 무슨 간첩…?”하며 허허 웃는데, 30여 년 세월을 어이없이 빼앗긴 사람 같지 않게, 얼굴에 그늘이 없다. 조 의장이 “저 친구는 징역이 체질인 모양”이라고 하는 말에 모두들 가슴 아프게 웃었다.
연극을 구경하거나 취미로 연극 동아리 활동 같은 걸 하는 것이 바둑 두는 사람들, 특히 프로기사나 프로를 지망하는 청소년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정신과 의사에게 물어보았다. 김정일 박사는 신경정신과 쪽에서는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의사다. 바둑도 3급쯤(인터넷 3~4단) 두고, 예전에 <중앙일보>에 의학 추리소설을 연재했을 정도로 글도 잘 쓰고, <상처꽃>과 같은 서사치유연극에도 관심과 조예가 있어 자신의 병원 지하실에 무대를 만들어 실제 연극치료도 하고 있다.
“도움이 됩니다. 무의식의 의식화, 평소에는 생각하지 않고, 생각나지도 않는 것들이지만, 의식 어딘가에 있는 기억이나 생각을 의식하는 것, 그게 성숙입니다. 인격의 성숙을 말하는 것이지요. 바둑은 고도의 멘털 승부이니까요. 프로기사들은 대개 내향성이지요. 무의식의 의식화 훈련을 통해 내향성에 있는 것들이 외향성으로 드러나게 되면 정신적 균형이 이루어집니다.”
상처꽃은 중간 중간에 코믹을 삽입하고 있다. 관객을 위한 배려다. 바둑 식구 한 사람이 말했다.
“시대의 아픔이 뭔지, 그걸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해야 하는지 보려고 왔다. 그런데 몰입하는 도중에 웃음이 나와 당황스러웠다. 그런 의미에서 무겁고 어둡게 일관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풍자와 웃음은, 조금은 다르다. 배우는 어둡고 무거운 걸 견딜 수 있지만, 관객은 힘들 거라고 생각한 것이라면, 글쎄. 치유는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치유하는 것 아닐까.”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