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부살인을 사주한 영남제분 회장 부인 윤길자 씨가 호화병동에서 생활을 해 논란이 일었다. 아래는 여대생 하지혜 씨 살해사건 현장검증. 살해 혐의로 구속된 윤남신 씨가 공범 김용기 씨에게 공기총을 건내주는 장면.
“여기까지 온 것도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법의 심판이 그들(피의자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을 때면 답답하고 불안하다.”
지난 20일 저녁 서울 종로구 통의동 한 카페에서 마주한 하진영 씨(37)는 자신을 먼저 ‘여대생 공기총 살인사건 피해자 오빠’라고 소개했다. 여동생 하 씨가 세상을 떠난 지 12년이 지났지만 오빠 하 씨는 여전히 ‘하지혜의 오빠’라는 이름으로 진상규명을 위한 긴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지난 15일은 영남제분 사모님 윤 씨의 특혜성 형집행정지를 공모한 혐의 등으로 지난해 9월 기소된 박 교수와 류 회장의 항소심 공판이 있는 날이었다. 하 씨의 살인을 교사한 윤 씨의 ‘합법적 탈옥’을 가능하게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두 사람을 법정에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오빠 하 씨는 ‘기적 같은 일’이라고 표현했다. 하 씨는 “어떻게 보면 10년도 더 지난 사건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함께 아파해 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 씨 가족이 윤 씨가 비정상적인 형집행정지를 받고 6년간 감옥이 아닌 병원특실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지난해 3월이었다. 2004년 5월 살인을 사주한 윤 씨와 범인들이 무기징역을 받으면서 사법적인 단죄만은 끝났다고 생각한 하 씨 가족에게 들려온 윤 씨의 호화병동 생활 소식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이에 하 씨 가족은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언론사 등에 윤 씨의 호화병동 생활 의혹을 제보하는 등 적극적 대응에 나서게 된다.
결국 재벌 사모님의 수상한 형집행정지 의혹은 같은 해 5월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방영됐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윤 씨가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총 3번의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았고 이를 15차례 연장했다는 사실이 방송을 통해 세간에 알려지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 논란이 거세게 일었다.
방송 이후 숨진 하 씨의 모교인 이화여대 동문들은 교내 온라인 모금운동을 통해 신문 1면에 하 씨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광고를 실었다. 네티즌들은 온라인 카페 ‘안티 영남제분’을 개설하고 ‘고 하지혜 양 진실규명위원회’를 조직해 세브란스병원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지난 2월 7일 1심에서 허위 진단서를 작성한 혐의의 박 교수와 영남제분 계열사에서 자금 수십억 원을 빼돌린 혐의를 받은 류 회장에게 각각 징역 8개월과 징역 2년을 선고됐다. 그러나 재판부는 류 회장이 부인 윤 씨의 형집행정지를 위해 허위 진단서 발급 대가로 박 교수에게 1만 달러를 지불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과 변호인 측은 항소했고 지난 4월 7일 박 교수는 항소심을 앞두고 보석을 통해 죄수복을 벗었다. 류 회장 측도 “피해회복이 대부분 이뤄졌고 피고인이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점에 대해 반성하고 있으며 이미 7개월의 구속기간이 경과된 점에 미뤄 원심의 양형이 지나치게 무겁다”고 주장하며 보석을 신청했지만 기각됐다.
지난 4월 22일과 5월 15일에 열린 항소심에서는 박 교수 계좌에 입금된 1만 달러의 출처와 허위진단서 유죄 여부를 놓고 양측이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박 교수 측 변호인인 구충서 변호사는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박 교수 측에 입금된 1만 달러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가는 박 교수에게 처가 측이 지급한 돈”이라며 “형집행정지는 검찰에서 최종 결정하는 것이며 의사의 진단서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윤 씨가 교도소 수감 중 처음 입원했던 곳은 세브란스 심장내과다. 심장질환 검사 중 유방암이 발견됐고 이에 유방암 권위자인 박 교수를 찾아 수술을 받았을 뿐 허위진단서를 작성한 사실은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검찰 측은 항소심에서 “이번 형집행정지를 판단하는 데 있어 검찰의 결정에도 책임이 있다고 변호인 측이 주장하지만 반대로 형 집행을 결정할 만한 참고사항은 의사의 진단서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박 교수와 류 회장 간의 뇌물수수 혐의와 관련해서도 “류 회장이 세브란스병원에서 진료비를 결제한 시각과 박 교수가 미화 1만 달러를 자신의 계좌에 입금한 시각이 유사해 금품을 주고받을 시간은 충분했다”고 밝혔다.
박 교수와 류 회장의 형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허위진단서 유죄 여부와 뇌물수수 혐의와 관련해 양측의 입장이 판이하게 갈리는 가운데 다음 항소심 3차 변론 공판은 6월 12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릴 예정이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
청부살해 사건 앞과 뒤 사모님 6년간 감옥 대신 특실 윤 씨의 억측과 횡포는 나날이 심해졌다. 김 씨와 하 씨가 불륜관계라는 상상에 사로잡힌 윤 씨는 하 씨 가족을 상대로 폭언과 협박을 일삼았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하 씨는 윤 씨를 상대로 접근금지가처분 신청을 했고 법원은 이를 받아들였다. 법원의 결정은 ‘사모님’ 윤 씨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윤 씨는 결국 하 씨의 살인을 교사하기에 이른다. 하 씨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윤 씨는 폭력전과가 있는 조카 윤남신 씨(54)에게 1억 7500만 원을 주며 살인을 사주했다. 생활고를 겪고 있던 조카 윤 씨는 고등학교 동창 김용기 씨(52)를 끌어들여 함께 공기총을 구입하고 한 달여 동안 하 씨를 미행해 일상을 파악했다. 범인들은 인적이 드문 새벽시간을 노렸다. 2002년 3월 6일 새벽, 수영장에 간다며 집을 나선 하 씨를 납치해 차에 태운 범인들은 검단산으로 이동해 하 씨를 구타한 후 얼굴과 머리 부위에 공기총 6발을 쏴 살해했다. 이들은 범행 4일 후인 2002년 3월 20일 베트남으로 도주했으나 인터폴 적색수배 발령이 내려져 중국 공안에게 체포된 후 한국으로 추방돼 범행을 자백했다. 윤 씨는 재벌가 사모님답게 호화 변호인단을 꾸렸다. 하지만 하 씨를 살해하도록 교사한 윤 씨와 이를 실행에 옮긴 범인들은 2004년 5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세간의 충격을 준 ‘여대생 공기총 청부살인 사건’은 사법적인 단죄가 끝나면서 일단락되는 듯했으나 2013년 윤 씨가 특혜성 형집행정지를 받고 병원 특실에서 생활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다시 한번 여론의 공분을 사게 된다. [배] |
피해자 가족 ‘영화 제작’ 승낙 까닭 “반성하지 않는 그 사람들 때문” 그러나 영화 제작에 회의적이던 하 씨의 가족들은 이를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 오빠 하 씨는 이를 ‘반성하지 않는 그 사람들’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 씨는 “이 일의 발단은 사촌 형인 김 씨였다. 어렸을 적엔 지혜랑 나랑 사촌형 김 씨랑 자주 같이 어울렸다. 방학 때 붙어있다 헤어질 때면 떨어지기 싫어 울기도 하는 그런 사이였다. 그랬던 그 사람이 지금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 돼 버렸다”며 “나는 공판장에서 그들(류 회장 일가)을 마주해야 한다.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재판장에서 보는 그들의 얼굴은 여전히 ‘돈이면 다 해결할 수 있다’는 표정이다”라고 토로했다. 하지혜 씨 사건은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과 <집으로>를 연출한 이정향 감독에 의해 영화화될 예정이다. 하 씨 가족이 수많은 영화사의 제안을 고사하고 이 감독과 손을 잡은 이유는 오랜 시간 이어진 인연 때문이었다. 이 감독은 12년 전 사건 초기부터 관심을 갖고 조사를 해오다 지난해 가해자 형집행정지를 보고 오빠 하 씨에게 직접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오빠 하 씨는 “어느새 이 분은 저희 가족에겐 감독이 아니라 가족이 됐다”는 말로 이 감독과 함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지난해 7월부터 영화화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 현재는 시나리오 초고가 완성된 상태라고 한다. 오빠 하 씨는 “감독님이 가족의 이야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 귀 기울여 주신다”며 “딱 하나 요구한 것이 있다. 이 영화는 꼭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져야 하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덧붙였다. [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