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의 ‘숨겨진 여인’으로 살아온 김경희 씨가 40년여 만에 처음으로 드라마 같은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일요신문>에 털어놨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두 사람은 1973년 처음 만나 딸 둘을 낳았지만 그 존재는 30년 가까이 철저한 비밀에 부쳐졌다. 그러다가 정 회장이 타계한 2001년 김 씨가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고, 잠잠해질 무렵인 2006년 ‘유산상속조정신청’으로 다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 와중에도 베일에 가려 있던 김경희 씨가 최근 <일요신문>과 단독으로 만나 그간의 비화를 털어놨다. 두 차례, 다섯 시간이 넘는 김 씨와의 인터뷰와, 김 씨가 자비로 출판했지만 아직 서점에 내놓지 않은 <나의 사랑 정주영>을 토대로 비운의 인생 비사를 재구성했다.
# 어린 시절
김경희 씨는 1953년 서울에서 두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군 장교를 양아버지로 둬 미군부대 공사를 모두 따낼 수 있었기에 어렸을 때부터 부유하게 자랐다. ‘무엇이 갖고 싶냐’는 아버지의 물음에 마침 하늘을 날던 비행기를 가리키자, 경비행기를 타고 가족이 부산 해운대로 여행을 갔을 정도였다. 어머니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한 장안의 소문난 미녀였다.
그녀는 아버지의 든든한 지원 아래 어머니의 권유로 다섯 살 때부터 발레를 시작했다. 명동의 극장에서 공연을 할 때 관객이 없으면 아버지가 표를 모두 사서 기죽지 않게 해줬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그녀는 영국과 러시아로 발레 유학을 준비하던 중 재미삼아 봤던 탤런트 시험에 합격, 연기자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처음 맡은 단역에 NG를 너무 내 재촬영을 10번도 더 해야만 했다. 자신이 봐도 연기력이 너무 부족했다. 연기를 배우기 위해 그녀는 연극영화과에 들어갔다.
# 첫 만남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젊은 시절 김경희 씨.
정 회장은 밥을 사준다는 핑계로 자주 연락을 해왔다. 김 씨도 그것이 못내 싫지만은 않았다. 몇 번의 만남 후에 정 회장은 함께 김 씨 집으로 가자고 한다. 당시 김 씨의 부모는 아버지의 잦은 외도로 별거 중으로 사실상 이혼한 상태였다. 집에서 정 회장은 김 씨 어머니에게 자신은 대구에 일이 있고, 김 씨도 대구에 외삼촌이 있으니 같이 가자고 한다. 김 씨와 어머니는 정 회장의 링컨 콘티넨탈 리무진을 타고 대구로 향한다. 그것이 정 회장과 김 씨의 첫 여행이었다. 그 뒤로 정 회장이 김 씨를 1년을 따라다닌 끝에 고백을 했다.
# 비밀 결혼
“따님을 맡겨주세요. 이 아이 평생 밥은 굶기지 않겠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김 씨의 어머니를 만난 자리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김 씨의 어머니는 이를 승낙했다. 그 배경에 대해 김 씨는 “어머니는 아빠를 마음에 들어 했다. 눈이 맑다며, 나쁜 사람 같지는 않다고 했다”고 회고했다. 김경희 씨는 정주영 회장을 ‘아빠’라고 불렀다. ‘애들 아빠’가 그렇게 굳어진 듯싶었다.
그때부터 정 회장과 김 씨의 비밀 결혼 생활이 시작됐다. “결혼식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살게 됐다”는 것. 다만 정 회장은 김 씨를 데리고 본인의 아버지와 어머니 무덤으로 찾아가 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김 씨는 그때를 “아빠가 두 번째 장가간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결혼 같지 않은 결혼을 하며 김 씨가 꾸던 연기자의 꿈은 사그라졌다. 정 회장이 연기를 당장 그만두라며 불 같이 화를 내는 바람에 김 씨는 모 여대 무용과로 학적을 옮겨야 했다. 이후 김 씨는 TV에서 정 회장의 모습을 본다. 현대그룹이 점점 번창해 정 회장도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다. 김 씨는 “TV를 통해서야 아빠가 부인과 자식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고도 되돌아 갈 수 없었다. “이미 너무 많이 건너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쯤 정 회장은 김 씨에게 청운동 자택 근처로 거처를 옮기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김 씨는 엄연히 부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김 씨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정 회장은 서운해 하긴 했지만 더 이상 그 문제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정 회장은 울산 조선소(현대중공업) 영빈관을 좋아해 김 씨를 그곳으로 자주 초청했다. 어느 날은 요트를 샀다며 김 씨를 데려갔다. 처음 태워주는 사람이 김 씨라는 말도 덧붙였다고 한다. 김 씨는 “아빠는 뭐든 처음 사면 나부터 태워줬다. 나를 그렇게 끔찍하게 아꼈다”고 말했다.
# 미국 이민과 출산
미국에 간 김 씨는 정 회장과 만난 지 6년째인 1979년 큰아이를 낳는다. 그레이스 정이었다. 미국에서 몸조리를 끝내고 평창동 어머니 집으로 귀국했을 때야 정 회장은 딸 그레이스와 처음 대면한다. 정 회장은 자신과 쏙 빼닮은 그레이스의 이목구비를 보고 너무나 흐뭇해했다.
다시 미국으로 간 김 씨와 딸 그레이스에게 정 회장은 매달 1000달러씩 송금해줬다. 미국에서 살기에는 적은 돈이었다. 하지만 재벌 총수임에도 자신을 위해서는 어느 것에도 돈을 쓰지 않는 정 회장에게는 적잖은 돈이었다. 큰딸이 태어나고 2년 뒤인 1981년 김 씨의 둘째 자식이자 정 회장의 막내딸이 태어난다. 엘리자베스 정이었다.
딸이 한 명일 때는 정 회장이 보내주는 돈으로 어떻게 생활했지만 둘째가 태어나고부터는 생활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김 씨는 당시를 회상하며 “어머니가 먹여 살렸다”고 말했다. 김 씨는 “정 회장은 어머니 돈으로 풍족하게 사는 것도 못 참아 했다”며 힘들었던 생활을 상기했다.
김 씨는 미국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 진출률이 높은 것을 보고 USC(남가주대) 의과과정에 도전했다. 정 회장이 김 씨에게 발레도 그만두라고 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그러나 낯선 이국땅에서 처음 배우기 시작한 의학과정은 김 씨에게 너무 버거웠다. 김 씨는 “너무 어려워서 2년간 악착같이 다녔는데 나중에는 몸이 아파왔다”고 설명했다.
김 씨는 몸도 아프고 결혼 생활이 처음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라 병이 나는 등 살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김 씨는 마음의 병을 고치기 위해 1983년 경상남도 합천군 해인사 백련암으로 돌아왔다. 정 회장은 백련암으로 김 씨에게 편지를 보낸다. 1983년 7월 25일 소인이 찍혀 있는 편지가 아직 남아 있다.
# 어긋나는 두 딸
암자를 나와 다시 미국으로 간 김 씨는 생활비를 벌어야겠다는 마음에 자격증을 취득해 부동산 중개업자로 살아간다.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어느새 학교 다닐 나이가 됐다. 아이들은 똑똑했다. 주위에선 영재학교를 보내야 한다고 했다. 김 씨는 이 말을 정 회장에게 전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불같이 화를 내며 “그건 정상적인 생활이 아니다. 아이들은 평범하게 길러야 한다. 그러다 애 버린다”는 말만 돌아왔다고 한다. 정 회장이 “퍼블릭(공립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말해 그렇게 했지만 질 좋지 않은 친구들을 만나며 아이들도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방황이 심해지자 김 씨는 유럽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처음 스위스의 학교를 알아봤지만 스위스의 학교에서는 두 딸의 학교 성적이 나빠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프랑스에서도 파리는 받아주는 곳이 없어 파리에서 1~2시간 승용차를 타고 가야 나오는 시골 학교에 아이들을 맡겼다.
그러나 두 딸은 프랑스에서 언어 때문에 무척 힘들어 했다. 특히 첫째가 너무 힘들어해 2년이 지났을 무렵 김 씨는 돌아오기로 결정한다. 둘째 딸은 프랑스어를 익히고 어느 정도 적응했지만 첫째가 힘들어하는 모습에 모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미국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교육과정이 문제였다. 교육과정이 바뀌면서 공부에 연계성이 없어져 아이들 공부는 더욱 힘들어졌다.
이렇게 아이들이 커가면서도 정 회장과는 때때로 만났다. 정 회장이 김 씨에게 전화를 해서 약속장소를 가르쳐 주면 그곳으로 찾아가 만나거나, 정 회장이 미국으로 올 때면 김 씨 집에 들르는 식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정 회장과 김 씨의 관계에 터닝 포인트가 됐던 1992년 대통령선거가 시작된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최초공개] 정주영 ‘숨겨진 여인’ 김경희 40년간 감춘 사랑과 증오 2편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