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씨는 말끝마다 이렇게 되뇌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숨겨진 여인’으로 산 지 40년여 만에 처음으로 <일요신문>에 그 비화를 털어놓은 그녀다. 하지만 그의 인생 스토리를 듣고 있노라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때문에 <일요신문>은 김 씨에게 이런 의문점을 집요하게 따져 물었다. 그녀와의 인터뷰 중 그 부분만 일문일답 형식으로 정리했다. ‘아빠’ 등 정주영 회장에 대한 김 씨의 호칭은 그대로 썼다.
김경희 씨는 자신과 정주영 회장 사이의 비화를 두 차례 다섯 시간에 걸쳐 털어놨다. 그녀는 인터뷰 내내 정 회장을 ‘아빠’라고 불렀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당시에는 그렇게 나이가 많은지 몰랐다. 실례라고 생각돼 묻지도 않았다. 여자 마음이 그렇다. 남자가 좋다고 하고 자꾸 따라다니고 잘해주는데 그 남자가 싫지 않으면 마음이 가게 돼있다.”
―본인은 그렇다 치고 어머니까지 결혼을 허락하신 부분도 의아하다.
“그 사람 기가 엄청 셌다. 그 기에 눌린 것도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정 회장이) 나에게 결혼 허락을 구하면서 ‘밥은 굶기지 않겠다’라고 한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한다. 허황되거나 꾸밈없는 말이 좋았던 것이다. 그리고 눈이 초롱초롱한 게 마음에 든다고도 했다.”
―당시에도 현대그룹은 큰 회사였는데 정 회장의 가족관계를 어떻게 모를 수가 있나.
“몰랐다. 몇 년 뒤에 아빠 사업이 잘되면서 유명해져 TV에도 나오게 되면서 알게 됐다.”
―혼인신고 등을 했으면 당연히 알 수 있는 것 아닌가.
“정식 결혼식은 올리지 않고 부모님 산소에 가서 인사를 드리고 왔다. 그땐 어려서 잘 몰랐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차차 혼인 신고 등의 절차를 하겠지’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았을 때는 따지지도 않았다. 알면 뭐 하겠나. 다 늦었는데….”
―사람들은 김경희 씨가 ‘돈 보고 정 회장을 만난 것 아니겠느냐’고 의심을 할 게 빤하다.
“돈 보고 만난 것이 아니다. 우리 집도 엄청난 부자라 돈은 많았다. 그 사람과 만날 때 차를 직접 운전해서 날 데리러 왔었는데, 사실 그때 속으로 ‘차가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사람 재산에 관해 들은 것도 자동차 공장을 갖고 있다는 말이 전부였다. 그 사람이 너무 집요했다. 어머니에게도 딸을 달라고 계속 그렇게 하니까 결국 결혼하게 된 것이다.”
―결혼 후 정 회장의 경제적 지원도 생각보다 적다는 생각이 든다.
“(정 회장이) 지독하게 검소했다. 워낙 검소해서 어머니 돈도 못 쓰게 했다. 구두도 바닥에 산 날짜를 적어두고 10년을 채워야 버렸다. 옷도 재킷 안에 구매 날짜를 수를 놓아서 10년을 입고 버렸다. 어느 날은 구두가 하도 후줄근해서 제발 사라고 했더니 엄청 혼났다.”
―정 회장과는 얼마나 자주 만났나.
“처음에 1주일에 한 번 정도 왔다. 아이를 낳고난 후에는 사업이 커져 한 달에 한 번 정도 만났다. 그 후 적어도 3개월에 한 번씩은 봤지만 대통령 선거 출마하고 난 뒤에는 변호사가 자꾸 막았다. 선거 끝나고서 돌아가실 때까지 두세 번 본 것이 전부다.”
―소송이 끝난 후에도 유산에 대해 계속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가 뭔가.
“아빠 재산이 10조 원 이상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때였다. 하지만 두 딸이 유산 상속을 받을 때 아빠 재산을 800억 원, 부채 130억 원가량으로 계산했다.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현대가 얼마나 큰 회사인데. 또 사전 상속을 받은 자식들은 상속분을 미리 받았다고 계산하고 분배해야 하는데 분배 과정이 일률적으로 이뤄졌다.”
―상속받은 주식을 빼앗기다시피 했다는 얘기는 또 뭔가.
“현대 측과 소송 할 때 내게 변호사를 소개시켜준 김 아무개 씨가 있었다. 이 사람이 소송이 끝나고 와서 ‘아이들이 어리니 유산으로 받은 주식은 현대 측에 맡겨두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유산으로 받은 부동산은 팔아서 현금으로 주겠다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가 변호사가 한 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중에 보니 주식을 팔아서 받은 것으로 돼있었다. 그 사람을 믿고 한국말도 모르는 애들한테 억지로 사인하라고 해서 애들도 다 사인을 시켰다. 그러니까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어쨌든 2차 소송 후 40억 원을 더 받고 합의했으면 끝난 것 아닌가.
“내가 소송을 포기한 이유는 ‘가족 같은 대우’를 약속받았기 때문이다. 난 돈보다 똑바로 살고 싶었던 사람이다. 만약 끝까지 소송을 했다면 40억 원보다 더 큰돈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 가족이란 말에 합의한 것이다. 하지만 가족은 없었다. 철저히 무시당했다. 반이라도 아빠 피가 섞인 동생이, 망해서 차에서 자고 있다는데 단칸방이라도 마련해줬다면 난 소송할 생각도 안했을 것이다.”
―800억 원대에 이르렀다는 그 많던 재산은 다 어떻게 된 건가.
“크게 사업을 벌였는데 사기꾼들이 몰려와 사기를 많이 당했다. 한번은 건물 다섯 개를 수리 맡겼는데 1년 만에 물새고 난리가 났다. 다시 수리를 해야 해서 돈이 이중 삼중으로 들었다. 좋은 땅이라고 해서 산 땅은 오히려 값이 내려갔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빚이 쌓이고, 이 빚을 감당을 못하게 돼 한 번에 모든 재산이 다 날아갔다.”
―또 다시 소송을 걸면 사람들은 ‘도대체 얼마면 되냐’고 물어볼 듯하다.
“얼마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날 속였다. 이제 더 이상 그들에게 속지 않을 것이다. 되든 안 되든 끝까지 소송을 해볼 생각이다.”
―이미 다 끝난 일인데 정 회장의 유언장을 보고자 하는 이유가 뭔가.
“정주영 회장이 누굴 속일 사람이 아니다.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리신 분이 자기 자식들에게 이렇게 할 리가 없다. 나에게 몇 번이나 당부했다. ‘유언장에 살길을 다 마련해 놨다. 걱정하지 마라. 설마 내가 내 새끼 살길하나 마련해놓지 않겠느냐’며 몇 번이고 말했다. 유언장은 분명히 있다. 다만 저들이 짜고 공개하지 않는 것이다.”
―굳이 책까지 만든 이유는 무엇인가.
“저들(현대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정 회장과 내가) 오다가다 만난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렇게 스쳐갔던 여인들하고는 다르다. 그런 착각을 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책을 냈다. 난 한 사람만 보고 산 사람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일본, 미국 등 전 세계로 출판할 거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배워야한다. 나쁜 면이 있는 것은 고치도록 하고 싶은데 비서들이 막아서 현대가에 말을 할 수도 없다. 돈만 가지고 사는 게 아니란 것을 보여주고 싶다. 애들도 보게 만화로도 만들어 내려고 한다.”
―정주영 회장과 찍은 사진은 없나.
“미국 집에 다 있었다. 붓글씨도 써주고 나를 그려준 그림도 있고, 편지도 있고, 사진도 있었다. 이번에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한국에 들어왔는데 미국 집이 경매로 넘어가면서 모두 없어졌다. 그 이후 미국으로 간 적도 없고. 집안이 풍비박산 났는데 그런 것 건질 생각도 못했다. 미국으로 가게 되면 한 번 찾아 볼 거다.”
―정주영 회장은 둘째가 딸이라서 아쉬워했다고 했는데 만약 아들이었다면 달라졌을까.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듯하다. 만약 (정 회장 생전에) 호적에 올리려면 본가로 아이를 보내야 했다. 아빠 나이가 또 많잖은가. 당시 변중석 여사도 아팠다. 보내도 유모에게 키워질 것이 뻔했다. 돈보다는 애들이 어렸을 때 사랑을 받아야 하니까 내가 키우기로 했던 것이다.”
―그런 것이 후회가 되지는 않나.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힘들게 사느니 그때 보냈어야하나…. 그런 후회도 들지 왜 안 들겠나. 그때 애들 보내고, 나도 재혼하고 그랬으면 그게 지금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간혹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