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이후 대국민 담화를 통해 변화와 쇄신을 약속했지만 문창극 총리 후보자 부적격 논란으로 그 의미가 퇴색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제공=청와대
김기춘 실장은 청와대 비서실을 통할하는 인물. 청와대 참모진에 대해 문책성 개편이 이뤄진다면 총책임자 격인 김 실장이 영순위가 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김 실장은 청와대 인사위원장을 겸하고 있어 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 낙마 사태, 문창극 총리 후보자 부실검증 논란에 대해 실질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다. 김 실장이 교체되지 않았다는 것 자체로 인적쇄신은 없다는 인상을 풍기기에 충분하다.
오죽하면 그가 건재하게 살아남자 여당인 새누리당 내에서도 반발이 터져나왔다. 김상민, 민현주, 윤명희, 이재영, 이종훈, 이자스민, 새누리당 초선의원 6명은 12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문창극 후보자의 자진 사퇴를 촉구하면서 인사검증 책임론도 제기했다. 19대 국회 들어 새누리당 의원들이 이처럼 공개적인 집단행동에 나선 것은 처음이고,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처음이다. 새누리당 지도부가 이들의 집단행동 계획을 사전에 감지하고 적극적으로 만류했지만, 당초 10명이 넘을 것 같았던 회견 동참자 수를 6명으로 줄이는 데 그쳤다고 한다.
김기춘 비서실장
내각 개편 결과에 대해서도 “도대체 원칙을 모르겠다”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 책임을 묻는다면서 강병규 안행부 장관과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교체했지만 이주영 해수부 장관은 유임시켰다. 민경욱 대변인은 “이 장관이 여러 차례 사의를 표했지만 실종자 수색 등 수습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장관을 교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정부 내에서는 “수습이 우선이라면 법적으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지휘하는 안행부 장관은 왜 교체했느냐”는 반론이 제기되고 있다.
거의 대부분이 교체될 것으로 알려졌던 경제팀이 절반 이상 살아남은 것도 무원칙 인사의 사례로 꼽힌다.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방하남 고용노동부 장관 등이 교체됐지만 윤상직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서승환 국토교통부 장관,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등은 유임됐다. 장관급인 신제윤 금융위원장, 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도 유임됐다.
이를 두고 새누리당의 한 재선의원은 “경제팀 내에서 교체 대상으로 거론됐던 서승환 장관, 신제윤 위원장 등은 살아남은 반면 별 문제가 없었던 사람도 교체가 됐다”며 “부동산 정책 혼선, 금융기관 부실 논란 등은 괜찮다는 의미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결과”라고 비판했다.
보다 근본적으로 문창극 후보자의 부적격 논란으로 인해 박 대통령의 변화와 쇄신 약속이 형편없는 수준으로 퇴색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 대통령은 안대희 후보자가 사퇴한 이후인 지난 6월 2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총리 임명 후 개각을 통해 국정운영을 일신하고 새롭게 출발하려던 일정이 다소 늦춰졌지만, 국가 개혁의 적임자로 국민들께서 요구하고 있는 분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개혁과 국민의 요구’라는 총리의 자격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문 후보자가 민족 비하 발언 등으로 논란에 휩싸이는 바람에 박 대통령의 처지는 더할 수 없이 군색해졌다.
새누리당 내 비주류로 통하는 한 의원은 “박 대통령이 다른 역대 대통령들보다 탄탄한 지지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 덕분”이라며 “박근혜의 원칙과 신뢰가 국민들로부터 의심받기 시작했다는 게 가장 큰 패착”이라고 꼬집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