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씨. 이종현 기자
“오늘 딸(김경희 씨)이 불러 이 자리에 와서야 알았다. 딸은 나에게 상의도 안했다.”
―상의를 했다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김 씨에게) 그러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그레이스 아빠(정주영 회장)가 ‘동양의 별’인데, 역사에 남을 분인데 그런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 사람을 시켜서 중간에서 타협적으로 해야지. 이것을 (공개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요신문> 보도 이후 그 큰돈을 어떻게 다 잃었는지 이해가 안 간다는 반응이 많다.
“사업도 모르고 예술만 하던 딸에게 재산을 물려준 것이 잘못이다.”
―정주영 회장에게 따로 받은 것은 없나.
“정주영 회장이 돈 준다는 것은 기대도 안 하고 그걸 바라지도 않았다. 미국으로 처음 이민 갔을 때 남의 집에서 세 들어 사니까 그것이 안타까웠는지 집 하나를 사줬다. 당시 가격으로 30만 달러였다. 지금 돈으로 하면 100만 달러(약 10억 원)쯤 하겠지. 그 이외에는 생활비 조로 조금씩 받은 것밖에 없다.”
―정주영 회장과 김경희 씨의 결혼 아닌 결혼을 허락한 것도 의문이다. 돈 때문이 아니냐는 반응이 많은데.
“내가 왜 우리 딸을 돈에 팔겠나. 그 사람을 처음 봤을 때 키도 크고 멋있었다. 만약 결혼 허락을 구하러 올 때 호텔을 사준다거나 사업을 차려주겠다고 했다면 결혼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단지 ‘한 평생 제가 밥을 먹이겠습니다’ 한 마디에 넘어갔다.”
그레이스 정과 엘리자베스 정이 2012년 3월에 ‘오빠’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한테 보냈다는 편지. 김경희 씨가 <일요신문>에 제공했다.
―당시 정 회장의 신상에 대해선 왜 묻지 않았나.
“나이는 물어보지도 않고 조금 차이가 있겠지, 그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도 몰랐다. 머리도 새까맣고 키도 크고 젊어 보여서 신랑감으로 저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렇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았다면.
“이미 눈치를 보니까 저들끼리 맺어진 거 같은데 그걸 어떻게 묻나. 나도 무조건 그레이스 아빠가 좋더라고. 눈에 백태가 꼈는지, 하늘의 인연인지. 애가 좋다고 하니까 시집보낸 거다.
―정 회장의 가족 관계도 진짜 몰랐나.
“나중에 알았다. 부인 변중석 여사가 있고 이런 것들을…. 그렇다고 일부종사해야지, 여자는 한 명의 지아비만 모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결혼 시켰다.”
―혼인신고는 왜 안했나.
“의례히 혼인신고가 될 줄 알았지.”
―결혼식도 안했는데, 결혼을 한다는 것은 결혼식을 한다는 것 아닌가.
“(정주영 회장이) 내가 부인이 있다, 자식이 몇 있다, 이런 것은 말 안하고 내 허락만 받으려고 속인 것 아닌가. 그 사람이 결혼식을 해주겠다고 내게 약속은 했지. ‘차차 다 합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해외 출장을 간다, 어쩐다, 그러길래 그때 눈치를 챘다. 어차피 일은 저질렀는데 되돌릴 수도 없는 거고….”
―정상적인 부부가 아닌 생활이 지속됐을 텐데, 그냥 보기만 했나.
“한 7년쯤 지났을 때까지 애기가 없더라고. 내가 딸에게 물었다. ‘경희야 여기서 청산하자.’ 그랬더니 정리 안 한다고 했다. 또 나도 옛날 여자로, 한 남자에게만 바쳤는데 우리 딸을 말릴 수가 없었다. 미국으로 가기 전 애까지 생기니 더 이상은 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김경희 씨의 두 딸 그레이스 정과 엘리자베스 정의 어릴 적 모습.
―직접 현대가에 도움을 달라고 했다던데.
“지난해 12월부터 4개월간 석고대죄하는 마음으로 정몽구 현대차 회장 집 앞에서 서 있었다. 그것도 누구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만나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새벽 4시부터 서 있으면 출근길에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출근길부터 기분 나쁘게 하기 싫어서 안 갔고, 퇴근길에는 집 안에 들어가서 괴로울까봐 안 갔다. 내가 석고대죄를 하면 누가 전해도 전하면 만나자고 하든지 사람을 보내든지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서 있다가 비서라는 사람이 왔다. 그래서 애들(정주영 회장의 딸들)이 무서운 사람들 돌아다니는 곳에서 차에서 자고 있어 내가 불안하다고 전했다. 그런데 전달이 안됐는지 연락이 안 왔다. 그래서 현수막을 걸었다.”
―어떤 현수막이었나.
“하나는 정몽구 회장 집 앞에, 하나는 정몽준 전 의원이 대주주인 회사 앞에다 현수막을 걸었다. 문구는 ‘정주영 작은 부인, 두 딸과 굶어죽는다’ 그렇게만 썼다. 직원들이 근무를 안 하는 토요일에 달았다. 그렇게 두 번 했다. 정몽구 회장 집 앞은 바로 떼이고, 정몽준 전 의원 회사 앞은 며칠간 안 떼졌다. 그것을 봤는지 시민들이 도와주겠다고 전화와도 ‘죄송합니다. 집안일이라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만 했다.”
―지방선거 땐 정몽준 서울시장 후보 선거사무실 앞에도 찾아갔는데.
“연락이 안 왔다. 그래서 선거사무실로 직접 찾아갔다. ‘집안일로 왔는데 이 사람의 동생이다’라고 하니 요즘 정 후보가 너무 바빠서 만날 수가 없다고 해서 전화번호를 남겼는데도 연락이 없다.”
―현대가에 무엇을 더 요구하나.
“우리(본인과 김경희 씨)는 죽더라도 요구할 필요 없다. 하지만 애들(정 회장의 딸들)이 여태껏 공부를 못했다. 공부를 시켜 달라. 자기가 하고 싶은 분야에서 자립하고 결혼을 하면 그러면 저희끼리 살 것 아니겠나. 그것으로 만족하고, 위대한 아버지의 위대한 아들들이 손을 내밀어서 어린 애들에게 가슴 아픈 것을 풀어주고 가족으로 대우해주면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이 큰 것이 아니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