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인민복을 즐겨 입던 우칭위안 선생의 모습.
“…올해는 갑자년입니다. 그런데 60년 만에 돌아오는 보통 갑자년이 아니라 2500여 년 만에 한 번 돌아온다는, 우주의 질서가 크게 한번 탈바꿈을 한다는 ‘전관(轉關)갑자년’입니다. 돌이켜보면 지난 2500년은 미명의 세계였습니다. 싸움과 무질서와 혼돈의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올해로 미명의 시대는 끝났으니 이제 지구상에서 싸움은 없어지고 세계는 평화와 도의를 향해 나갈 것입니다. 이러한 전관갑자의 해에 내 바둑 인생을 마감하게 된 것은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이제 비록 현역기사로서의 활동을 마치고 은퇴하기는 하지만 앞으로도 바둑과 종교를 통해 미력이나마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나는 이 전관갑자의 해를 나의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세계의 평화를 희원하고 확신했던 선생의 고별사와는 달리 지구상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선생은 은퇴 후에도 새로이 연구한 ‘21세의 포석’을 발표하는 등 은퇴를 또다른 출발점으로 삼겠다“고 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선생은 인민복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선생을 직접 뵌 적은 두 번이었다. 한 번은 기자회견과 인터뷰에서 또 한 번은 검토실 먼발치에서. 두 번 모두 선생은 인민복 차림이었다. 그때의 인상이 기억을 지배하게 된 탓일까, 선생은 아마도 평생을 인민복 차림으로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1988년 초겨울, 제1회 응창기배 준결승이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렸다.
한 판은 조훈현 9단 대 린하이펑 9단, 다른 한 판은 후지사와 슈코 9단 대 녜웨이핑 9단이었다. 조훈현 9단은 선생의 사제(師弟). 같이 공부한 시절은 없었지만, 두 사람의 스승이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9단이다. 린하이펑 9단은 선생의 제자. 후지사와 9단은 조훈현 9단의 실전 스승. 선생과 린하이펑과 녜웨이핑은 중국인. 가로세로 얽히고설킨 인연들의 만남이었다. 인민복 차림의 선생은 조용하나 낭랑한 목소리로 검토실을 주도했다. 사람들은 대부분 선생 곁에 서 있었고, 선생의 말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기자가 말했다.
“인민복이 제일 잘 어울리는 사람이 둘 있다. 한 사람은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 총리, 또 한 사람은 우칭위안 선생이다.”
우칭위안 선생은 1939년부터 시작된 기타니 미노루와의 치수고치기 십번기에서 승리하며 일본 바둑계 1인자에 올라섰다.
“바둑수업에는 두 가지 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수단의 연구와 정신의 수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자는 이를테면 정석의 해부, 신수의 발견, 묘수풀이의 실전적용훈련 등으로 이것은 프로기사라면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것들은 말하자면 기량의 디딤돌입니다. 그러나 수단만으로는 진정한 ‘명인’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신적 수양의 뒷받침이 없다면 바둑기술자에 머물고 말지도 모르는 것이지요.”
“수단의 연구와 정신의 수양, 그것을 거울의 예로 비유하자면 수단의 연구는 거울 표면의 먼지를 닦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매일 열심히 닦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그에 비해 정신의 수양은 거울을 밑바닥부터 깨끗이 하는 일입니다. 바탕이 깨끗하지 않으면 표면을 아무리 닦아도 거울은 빛나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은 우리에게 일찍이 ‘기예인과 인격’이라는 또 하나의 의문을 던져 주었다. 기예인은 기예의 성취도를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인지, 아니면 인격의 성숙도 물어 볼 수 있는 것인지. 선생은 기예와 인격이 함께했다고들 한다. 이념과 성향을 떠나 다들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도사쿠(道策)와 슈사쿠(秀t策)는 사후에 ‘기성’으로 추앙받았지만, 선생은 생전에 ‘기성’ 소리를 들었으니까. ‘바둑은 조화(調和)’, 이것은 선생의 불멸의 어록인데, 선생은 바둑에서만이 아니라 삶에서도 조화를 실현했기 때문일까, 수명에서도 뭇 기사들을 압도하고 있다. 사카다 에이오 9단이 90세(1920~2010), 후지사와 9단이 84세(1925~2009), 다카가와 가쿠 9단이 71세(1915~1986), 조남철 9단이 83세(1923~2006)의 천수를 누렸는데, 선생은 한 세기를 넘었으니 말이다. 예전에 선생에 대한 기사를 쓰면서 이렇게 끝을 맺었던 생각이 난다.
“바둑사에도 시대 구분이 가능하다면 선생은 한마디로 바둑의 고전주의를 완성하고 낭만주의를 연 시대적 가교의 인물이었다. 바둑의 옛것은 모두 그에게 흘러들어갔고 새것은 모두 그로부터 나왔다. 문학의 괴테, 음악의 베토벤, 철학의 칸트였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