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0년 5월31일 왕자의 난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이 3부자 동반퇴진을 선언한 후 정몽구 정몽헌 회장과 함께 현대 사옥을 나서고 있다. 그러나 정 명예회장의 작고 이후 현대그룹은 조각나고 정몽헌 회장은 자살하기에 이른다. | ||
2003년 시작된 대북송금 특검 수사도, 그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검찰의 현대 비자금 수사도 오히려 의혹만 더 가중시키고 있는 꼴이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최근 발간된 <나는 박수받을 줄 알았다>(세상의 창)는 현대가(家)를 둘러싼 베일 속을 매우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고 있다. 이 책을 쓴 현직기자 김시래씨가 지난 5년간 현대를 출입하며 ‘로열패밀리’와 그 주변의 가신들을 근접 취재해서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주요 ‘증언’들을 담고 있는 까닭이다.
“왕회장은 현대그룹에서 너무나 큰 힘이었다. 모든 게 왕회장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런데 그의 건강에 이상신호가 오자 갑자기 힘의 공백이 생겼다. 따라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큰 배가 중심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왕회장 힘의 공백이 결국 형제간 경영권 분쟁인 왕자의 난을 불러왔다.”
현대 관계자의 이 같은 말은 절대 군주인 ‘재벌 오너’ 한 사람의 판단에만 의존하는 우리 기업 문화의 전근대성을 그대로 표출시킨다. 현대라고 하는 거대한 왕국은 이미 팔순을 훌쩍 넘겨 건강 악화설이 나돌았던 왕회장의 손짓 하나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나는 박수…>의 관련 내용을 간추렸다.
왕회장의 후계 구상
‘MK는 집안 일과 현대자동차 부문, MH는 비즈니스와 그룹 총괄, MJ는 정치와 현대중공업.’
이는 당초 왕회장이 구상한 현대그룹 후계 분할 구도였다. 그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현대그룹 회장은 내가 마지막이다. 후계자는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고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왕회장의 결심은 장남인 몽필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바뀌게 된다. 그는 사실 철저한 가부장적 인물이었다. 자신이 장자였던 것처럼 그 또한 장자를 매우 중요시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기업을 자식에게 물려준다면 반드시 장자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말썽이 생긴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5남인 MH를 후계자로 임명했다. 그래서 ‘왕자의 난’도 벌어졌다. 그런데 이런 판단의 이면에는 영어 실력이 상당 부분 작용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왕회장은 비록 초등학교 졸업 학력이지만 독학으로 웬만한 영어 대화를 할 정도의 수준까지 올랐다. 그는 MH와 MJ가 외국인과 자유롭게 대화하는 것을 무척 대견해 했다. 반면 장자인 MK는 그런 국제적인 감각 면에서 동생들에 비해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이는 두 현대 관계자의 증언에 잘 나타난다.
“아들과 동생들 가운데 유독 왕회장이 좋아한 MH와 MJ, 정세영 회장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영어를 잘한다는 것이다. MH는 그래서 후계자가 된 측면도 있다. MJ도 영어로 협상하는 것을 보고 흐뭇해 했다. 특히 현대자동차는 32년간 입사시험에 영어를 봤다. 왕회장은 정세영 회장에게 영어 시험을 어렵게 내라고 했다.”
“왕회장은 MK가 계속 퇴진(2000년 5월31일 정주영 명예회장이 밝힌 ‘3부자 동시 퇴진’안)을 거부하자 매우 단호하게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냐.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라고 말했다. 그러자 MK가 ‘할 일이 많다’라고 했다. 왕회장은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국제감각도 있어야 하는데… 영어도 필요하고…’라고까지 직설적으로 말했다.”
정보전이 승부 좌우
3월14일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이익치 회장을 밀어내는 인사를 감행했던 MK의 선공은 열흘 뒤 귀국한 MH측의 대반격(2차 왕자의 난)이 시작되면서 전세가 일거에 뒤집어졌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증언이 나왔다. MH의 소위 ‘역쿠데타’ 성공의 비결은 정보 싸움에서 앞섰다는 것.
당시 왕회장은 MH측의 가신인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이 보좌했다. 왕회장의 의식주는 현대건설이 맡았기 때문이다. 현대건설 총무과 직원은 왕회장 집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따라서 왕회장과 MK의 대화는 MH측 채널에 모두 걸려든 셈이다. 그 단적인 사례가 3월25일 오전의 상황이었다. 그 날은 MH측의 대반격에 의해서 MK의 공동회장직 박탈 결정 발표가 있은 다음날이었다.
충격을 받은 MK는 그날 아침 출근하지 않고 흥분한 듯 불그스레한 얼굴로 가회동 왕회장 집을 예고없이 방문했다. 그는 전날 폭음을 했다고 한다. 그가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34분경이었다. 그런데 10여 분이 지난 10시48분경 MH와 김윤규 사장이 들이닥쳤다. 당시 김 사장은 문 앞에 있는 취재진에게 “왕회장님이 오랜만에 두 아들과 식사를 하자고 불렀다”고 상황을 설명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 사진으로 본 현대가 사건들(왼쪽부터) ○2000년 3월 왕자의 난 당시 정주영 명예회장이 김윤규 현대건설 사장과 정몽구 회장의 부축을 받으며 가회동 집을 나서고 있다. ○2003년 2월5일 고 정주영 회장의 선영에 들른 정몽헌 회장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지난 2003년 8 | ||
결국 이날 점심 식사는 15분 만에 어색함 속에서 끝났다. 왕회장과 MK MH 형제, 김 사장 네 사람 모두 한마디의 말도 없었다고 한다. 왕회장과 MK의 독대 자체가 무산된 그런 상황이 발생했던 셈이다.
MK는 '왕따'였다
현대 계열사 가운데 알짜 기업인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확보 전쟁으로 비화된 왕자의 난은 결국 MK와 MJ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현대 왕국을 승계하면서 승리한 것처럼 보이던 MH는 사실상 패배자로 남게 된다. 결국 두 회사가 계열 분리로 떨어져 나가면서 남은 현대그룹은 빚더미에 나앉은 것.
MH가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택한 것은 2003년 여름의 일이지만, 주변에서는 이미 그 이전부터 그가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MH는 왕자의 난 이후부터 주변에서 소위 ‘왕따’를 당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친인척은 물론, 계열사와 정부측과도 관계가 멀어졌다. 그런 중에 유일한 버팀목이던 왕회장의 죽음은 더욱 그를 코너로 몰았던 듯하다.
왕회장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었던 2000년 11월 상황에 대한 관계자의 증언이다.
“왕회장이 입원해 있는 서울아산병원에서 MH가 아침에 가족회의를 하자고 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현대건설을 돕자고 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모두 피했다. MH는 친인척들을 만나려고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동생인 MJ만 어렵사리 만났다. 그는 친인척들한테도 ‘왕따’당하고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11월5일 MH는 사장단 회의를 소집했으나 현대전자측은 불참하기도 했다. 당시 현대전자측은 “우리는 현대 그룹의 정신적 계열사일 뿐”이라며 의도적으로 멀리하려 했다고 한다.
왕자의 난 때는 MK가 MH를 찾아갔으나, 동생의 냉대를 받았다. 이제 상황이 바뀐 것. MH는 형 MK를 만나기 위해 양재동 현대자동차 사옥까지 기습적으로 방문했으나 번번이 따돌림을 당했다.
MH측의 한 관계자는 “MH는 자존심을 버리고 형을 만나겠다고 했다. 한 인사가 ‘형은 자네가 무릎 꿇고 빌면 도와주겠다고 하더라’라고 해도 ‘이해한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전했다.
이에 MK측은 “MK는 여전히 왕자의 난 때 동생이 남의 떡이 더 커 보이자 그것을 뺏으려고 서툰 행동을 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MH가 형을 만나겠다는 것은 진심이 아니라 일시적인 어려움을 피해보려는 의도다”라고 불쾌해 했다.
MH와 꽤 절친한 형제였던 것으로 알려진 MJ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MJ는 주변 관계자가 찾아와 ‘형(MH)을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면 ‘도와야죠’라는 반응을 보였으나, 그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고 MJ의 측근이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