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씨의 생전 모습(왼쪽). 작은 사진은 사건 발생 5일 전 황 씨가 미니홈피에 남긴 글. 살기 힘들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2003년 학교 추천으로 D 사에 입사한 피해자 황 씨는 유 씨에게 “엄마 내가 이 회사에 들어간 게 기적 같아”라고 말하며 행복해했다. 그러나 행복했던 황 씨의 얼굴이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황 씨는 어머니 유 씨에게 “차를 사 달라” “나를 데리러 와 달라”는 등의 석연치 않은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D 사는 인적이 드문 곳에 위치했기 때문에 차편이 끊기는 늦은 시간까지 당직을 서는 날이면 동료들의 차를 함께 타고 나와야만 했다.
사건 당일인 2005년 5월 30일에도 황 씨는 야근을 하고 회사를 나섰다. 황 씨는 평소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던 인사과장 이 씨가 차를 태워주겠다고 하자 이를 거절하고 직장동료 고 아무개 씨(당시 32세)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러나 이들을 따라온 이 씨는 직장후배이기도 한 고 씨와의 실랑이 끝에 황 씨를 자신의 차에 태운 뒤 양평으로 끌고 갔고, 그 뒤 살해했다. 이틀 후인 6월 1일 범인 이 씨가 자수하면서 경찰은 이 사건을 직장 내 내연관계에 의한 치정사건으로 수사를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황 씨와 이 씨의 사이가 내연 관계라던 경찰 수사 곳곳에서 허점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범인 이 씨는 최초 경찰 진술에서 황 씨와 ‘내연관계가 아닌 단순 직장 동료’라고 했다. 그러나 같은 날 작성된 부검의뢰서와 수사기록, 변사사건 발생보고 지위건의서 등의 공문서에는 ‘내연관계’라는 표현이 등장하는가 하면 내연관계 기간을 8개월, 9개월, 10개월 등으로 일치하지 않는 내용을 기재했다. 황 씨의 어머니 유 씨는 “수사가 범행동기에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찰이 처음부터 ‘내연관계’ 증명에 초점을 맞추고 끼워맞추기 식 수사를 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이 황 씨가 이 씨에게 보낸 메일이라며 작성한 수사기록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이 둘 사이에 주고받은 이메일이라고 했던 시는 황 씨가 생전에 미니홈피에 올렸던 게시물이었다. 이에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원주경찰서 수사팀장은 “피의자와 피해자가 주고받은 이메일이 아니라 피해자의 미니 홈페이지에 접속한 것을 확인 정정하였고, 변사사건 발생보고와 부검의뢰서의 개요란에 내연관계로 돼 있는 것은 이후 수사를 하면서 확인된 바 없다”는 내용의 메일을 어머니 유 씨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이미 1심판결이 끝난 뒤였다.
유 씨는 범행이 일어난 ‘현장’인 이 씨의 차량도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경찰은 황 씨가 ‘이 남자 저 남자 만나겠다’고 말한 후 이 씨의 말을 무시하고 잠들어 이에 격분한 이 씨가 잠든 황 씨의 목을 넥타이로 졸라 살해 유기했다는 내용의 사건개요를 작성해 보고했다. 하지만 유 씨는 이 씨의 재산 가압류 과정에서 인계한 차량에서 천장과 문짝에 튄 혈흔들을 발견했다. 잠든 황 씨가 ‘조용히’ 살해된 것이 아니라 살해 전 심한 구타가 있었고 황 씨는 이를 방어했을 것이라는 정황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머니 유 씨는 이 과정에서 성폭행 시도까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 씨는 언젠가 이 사건이 재조사될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해당 차량을 컨테이너 창고에 7년째 보관하고 있다.
황 씨가 이 씨에게 보낸 연애편지라며 제출한 증거물. 추후 허위 편지로 드러났다.
황 씨가 납치될 당시 유일한 목격자였던 동료직원 고 씨가 위증한 사실을 밝혀낸 것도 유 씨였다. 고 씨는 경찰조사와 법정에서 “이 씨와 살해된 황 씨는 내연관계였으며 나는 황 씨와 통화만 하는 사이”라고 증언했다. 유 씨는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고 씨를 설득했다. 결국 고 씨는 진실을 털어놓고 2007년 위증죄로 벌금 300만 원을 선고받았다. 유 씨는 “재판 중 고 씨가 가해자에게 유리한 진술을 해 이 씨가 낮은 형량을 받았다. 처음부터 제대로 된 진술을 했다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씨는 1심에서 징역 15년, 2심에서 12년 형을 선고 받고 현재 복역 중이다.
황 씨의 9주기를 맞은 지금까지도 유 씨는 D 사의 사과를 받지 못했다며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직장 내 성희롱이 살인으로 이어진 사건에는 D 사의 도의적인 책임이 있지만 D 사는 황 씨의 죽음을 ‘개인사’로 치부하며 사건을 덮기에만 급급했다는 것이다.
유 씨는 “이 씨가 자수한 시점이 6월 1일 오후 6시 30분인데 D 사는 같은 날 업무시간에 이 씨를 해고하고 사장결재까지 받았다. 이 씨는 6월 10일 해외연수를 떠날 사람이었는데 갑자기 해고가 된 것이다”며 “딸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 아침까지 초조하게 기다리던 5월 31일 아침 D 사 관계자가 딸 출근 시간 전인 아침 8시 30분부터 전화를 걸어 와 ‘집에 별일 없느냐’ ‘업무적으로 물어볼 것이 있어 전화를 했다’며 수차례 물어 본 것도 이미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챘다는 방증”이라고 주장했다.
D 사는 사건 발생 8년 후인 2013년에야 ‘위로금 지급 합의서’를 내밀었다. 어머니 유 씨가 D 사의 대주주로 있는 대기업 회장이 있는 곳을 찾아가 ‘해결해 달라’고 호소한 다음이었다. 합의서는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언론 인터뷰에 응하지 않으며, 당사자 이외에 제3자에게 공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억 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이었다. 유 씨는 거부했다. 유 씨가 바라는 것은 D 사의 진정성 있는 사과였다.
유 씨는 지난 5월 청계광장에서 ‘성폭행 혐의도 인정해야 한다’는 내용의 재수사 건의서에 시민 서명을 받기도 했다. 유 씨는 곧 이 씨의 성폭행 혐의 재수사를 요구하는 고소장을 제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유 씨는 “딸의 시신이 발견된 당시 치마가 위로 걷혀 올라가 있고 속옷이 벗겨진 점, 속옷에 진흙이 뭉개진 흔적이 있었다. 단순살인이 아닌 강간살인으로 볼 수 있는 정황이 있었다. 이 부분은 수사된 적도 없고 성폭력특별법으로 처벌되지 않았다. 추가 고소해서 처벌을 받게 하는 게 엄마 된 도리”라고 말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