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비선라인’의 인사개입 의혹이 정가를 달구고 있다. 청와대 인사는 김기춘 비서실장(왼쪽)과 비선라인 ‘투트랙’으로 이뤄진다는 게 정설이었다. 이와 관련 박지만 회장(작은 사진), 이재만 비서관, 정윤회 씨 등 이른바 ‘만만회’가 문창극 전 후보자를 추천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은 여의도 시절부터 인사를 포함한 주요 현안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공식 라인보다는 드러나지 않은 ‘비선’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결정하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다. 현 정부 들어 인사와 관련한 파워 게임이 거의 노출되지 않은 배경이다.
정치권에선 현 정부 인사는 박 대통령과 ‘핫라인’이 개설돼 있는 소수의 비선라인과 인사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는 김기춘 실장, ‘투 트랙’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게 정설이었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인사가 대통령 고유권한이긴 하지만 직·간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자리만 수천 개다. 대통령 혼자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비선에서 인사가 이뤄지고 있다면 그 영향력은 엄청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는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 소수 측근들에 의존하다 보니 인재풀이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은 끊임없이 제기됐다. 검증 부실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총리 내정자가 세 명이나 낙마했다는 것은 현 정부 인사 검증 시스템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역대 정권에서 공직 후보자 검증 작업에 여러 차례 참여했던 한 사정당국 관계자는 비선라인에 의한 인사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인사는 없다. 핵심은 검증이다. 잘만 걸러내면 청문회 통과가 별로 어렵지 않다. 그런데 대통령이 콕 집어서 내려온 인사는 세밀히 검증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의혹이 있어서 물어보면 오히려 화를 내며 ‘내가 누군지 모르냐’며 방방 뛰는 사람들도 많다. 대통령 비선에서 추천한 인사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문창극 전 내정자가 낙마하고 사의를 표명했던 정홍원 총리가 유임되자 현 정부의 ‘인사 참사’에 대한 비난 여론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특히 누가 문 후보자를 추천했는지에 관심이 쏠렸다. 막후에서 박 대통령 인사에 관여했다는 비선라인으로 그 전선이 옮겨가고 있다는 얘기다.
당초 문 전 내정자 발탁 초기엔 박 대통령 원로 멘토 그룹인 ‘7인회’가 설득력 있게 오르내렸다. 7인회는 김기춘 실장을 비롯해 강창희 전 국회의장,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 김용갑 전 국회의원,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 최병렬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 현경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멤버다. 특히 안병훈 전 부사장은 문 전 후보자와 서울고 동문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부각됐다. 그러나 안 전 부사장을 비롯해 7인회 인사들 대부분은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문 전 후보자 추천설을 강하게 부인했다.
실제로 7인회는 김 실장을 제외하곤 정권 출범 후 박 대통령과 일정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김용갑 전 의원은 6월 21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우리 일은 끝났다. 우리는 인사에 대해서 누구도 추천한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김 전 의원은 “어떻게 그런 분(문 전 후보자)이 후보가 됐는지 모르겠다”고까지 했다. 오히려 7인회 멤버들 중 일부는 박 대통령과 김 실장에게 섭섭함을 갖고 있다는 전언이다.
최병렬 전 대표의 한 측근은 “(최 전 대표는) 정권이 바뀌고 나서 야인처럼 지내고 계신다. 최 전 대표 본인은 어떨지 몰라도 주변에선 김 실장이나 박 대통령이 너무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많다”고 귀띔했다. 한때 7인회는 박근혜 정부 1기 내각 구성에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도 알려졌으나 이에 대해서도 이 측근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최 전 대표를 비롯해 7인회 대부분은 인사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
사실 7인회와 함께 여권 일각에선 조심스럽게 박 대통령 ‘문고리 권력’으로 통하는 몇몇 측근과 친인척들 실명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공론화되진 못했다. 여권 내에서 이를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경향이 있는 까닭에서다. 한 친박 의원은 이렇게 설명했다.
“박 대통령이 의원 시절부터 삼성동팀 또는 신사동팀으로 불리는 비선라인을 가동하고 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 아니냐. 그런데 이를 공개적으로 얘기하진 못했다. 박 대통령이 극도로 불편해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당·청에서 박 대통령 비선라인을 꺼낼 수 있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박지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만만회’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박 의원은 문 전 후보자 자진사퇴 후 여러 인터뷰에서 “문 전 후보자 추천은 비선라인인 만만회에서 했다는 말이 있다”고 주장했다. 박 의원은 구체적인 이름은 거론하지 않았지만 정치권에선 만만회를 박 대통령 동생 박지만 EG그룹 회장, ‘참모 3인방’ 맏형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 그림자 실세 정윤회 씨 이름의 마지막 글자를 딴 것으로 보고 있다.
논란이 확산되자 박 의원은 “청와대 문고리 권력 인사들의 이름을 딴 것이 맞다”며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강조하기도 했다. 정치권 주변에서 설로만 떠돌던 박 대통령 비선라인 실체를 박 의원이 치고 나간 것이다. 거론되는 만만회 면면을 살펴보면 그야말로 현 정권 ‘실세 중 실세’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우선 박지만 회장은 대통령 동생이라는 점에서 ‘로열패밀리’로 통한다. 과거 정권에서 대통령 형제들은 권력 심장부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했다. 청와대 안방 살림을 도맡고 있는 이재만 비서관은 정호성·안봉근 비서관과 함께 박 대통령 문고리 권력 3인방 중 한 명이다. 이 비서관은 입이 무겁고 일처리가 꼼꼼해 박 대통령 신뢰가 남다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2004년 이후 공식석상에서 사라진 정윤회 씨는 베일에 가려져 있지만 ‘그림자 측근’으로 불리며 박 대통령을 보좌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들이 인사에 개입했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된 바는 없다. 오히려 여권 속사정을 잘 아는 이들은 그 가능성을 낮게 보기도 한다. 박 회장의 한 측근은 “박 회장은 누나가 대통령이 된 후 연락을 끊다시피 했다. 청와대엔 한 번도 안 들어갔다. 뻔히 주목받고 있는 걸 아는데 쉽게 움직이겠느냐”고 되물었다.
이재만 비서관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청와대의 한 관계자도 “이 비서관이 박 대통령을 오랫동안 모시는 비결이 뭔지 아느냐. 철저하게 비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비서관은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 인사 개입 운운은 이 비서관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다만 정윤회 씨와 관련해선 여권 내에서도 견해가 엇갈린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 대통령 경선 이후 박 대통령과 멀어졌다는 주장과 여전히 비선라인으로 활동하며 인사 등에 있어서 조언을 하고 있다는 반론이 나오는 것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이들을 만만회라는 이름으로 묶는 것에 대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이들 사이엔 미묘한 긴장 관계가 형성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정 씨는 지난 1998년 지금의 보좌진 3인방을 박 대통령에게 ‘세팅’해 준 장본인이다. 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 배후에 정 씨가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그러나 이 ‘만회’와 ‘만’, 즉 보좌진 쪽과 박 회장의 관계가 그다지 원만하진 않다는 게 정설이다. 박 회장 주변에선 정 씨를 가리켜 “박 대통령과 박 회장 남매를 이간질하는 장본인”이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앞서의 박 회장 측근은 “박 회장이 만약 인사를 하려고 했다면 정 씨 및 이 비서관 등 3인방과 마찰을 빚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런 게 없었다. 이는 적어도 박 회장은 인사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청와대는 박지원 의원을 통해 처음 거론된 후 일파만파 번진 만만회에 대해 “소설일 뿐”이라며 터무니없다는 반응을 보이면서도 경계의 끈을 늦추지 못하고 있다. 비선라인 논란이 확산되면 박 대통령에게로까지 불똥이 튈 것이란 판단에서다. 이에 청와대는 인재 발굴과 검증을 총괄하는 인사수석실을 신설하기로 했다. 청와대는 인사수석실과 민정수석 산하 공직기강비서관실의 이중 검증을 통해 인사 사고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청와대의 이러한 조치는 책임 회피의 성격일 뿐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는 못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재광 정치평론가는 “청와대는 펄쩍 뛰기 전에 왜 만만회라는 말이 나왔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만만회가 인사를 좌지우지 했는지 여부는 나중에 따져볼 일이다. 결국은 인사가 투명하지 못하기 때문 아니냐”고 꼬집으면서 “만약 비선라인에 의한 인사가 사실이라면 인사수석실 역시 유명무실해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