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월18일 최연희 국회 법사위장이 사형제도 폐지안을 소위로 넘기고 있다. | ||
유씨의 이 같은 행동은 어쩌면 ‘자신을 버리고, 자신이 등진’ 이 세상을 빨리 떠나고 싶은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나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씨의 이런 심정이 사실이라 해도 그의 뜻대로 ‘상황’이 쉽게 끝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사형수들에 대한 사형집행이 이뤄진 지가 벌써 7년 5개월이 넘어가는 등 정부가 사형집행을 할 ‘의지’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국회의원 1백75명이 발의한 ‘사형제 폐지 특별법’이 국회에 정식 상정돼 논의를 기다리고 있다. 본격적으로 사형제 존폐 논란이 치열해지는 상황이라 사형집행은 앞으로도 상당 기간 더 연기될 가능성이 높다.
법무부에 따르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사형이 집행된 사람들은 총 9백2명이다. 물론 ‘보도연맹 사건’ 등 한국전쟁 당시 탈법적으로 이뤄진 사형 집행 등은 빼고, 정식 재판을 받아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이후 사형된 경우만이다.
지난주 유영철의 사형이 확정되면서 우리나라의 사형수들은 총 60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현 노무현 정부는 물론, 지난 김대중 정부도 사형집행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퇴임하기 직전인 1997년 12월30일 23명의 사형수가 한꺼번에 사형된 이후 집행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무려 13년 가까이 사형수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현 정부와 지난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밝힌 적은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인권변호사 출신인 노무현 대통령도 개인적으로는 사형집행을 꺼릴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러다 보니 사형집행이 계속 미뤄지고 있는 것이다.
유영철을 비롯, 현재 사형이 확정돼 구치소 등에 수감돼 있는 60명은 모두 살인과 관련이 있는 범죄자들이다. 이 중 48명은 2명 이상의 사람을 죽였고 10명 이상 살해범도 유영철을 포함, 3명이나 된다.
사형수들 중에는 사건이 발생했을 때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경우가 많다. 카드빚 8천만원을 갚아주지 않는다며 할머니와 어머니를 살해하고 아버지마저 죽이려다 실패한 사건으로 사람들을 경악시켰던 ‘대학 휴학생’ 패륜 아들은 지난해 6월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 지난 9일 사형이 확정된 유영철. | ||
특히 다수를 죽인 사형수들은 종교 문제가 얽힌 경우나 유영철처럼 반사회적 성향이 큰 경우가 많았다.
어떤 사형수는 부인이 특정 종교에 빠져 가정을 등한시하자 종교회관에 쫓아가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15명을 죽게 하고 25명에게 중화상을 입힌 혐의다. 특정 종교를 이탈, 비방한 신자 6명을 교주의 지시로 연쇄 살인하고 야산에 암매장해 살인 및 사체유기죄로 사형이 선고된 사람도 있다. 2000년 부산, 울산, 경남 지역의 부유층을 범행 대상으로 삼아 철강회사 회장 부부 등 9명을 잇따라 살해한 혐의의 사형수는 유복자로 태어나 고아원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사회에 대한 증오심을 키운 것으로 나타났다.
단 1명을 죽였다 해도 유괴살해나 강간살인, 사체훼손 등 반인륜적인 엽기 범죄자들의 경우 사형을 선고받았다. 모 사형수는 빌려간 돈 갚을 것을 독촉하는 사돈을 야산으로 유인해 목을 졸라 살해해 암매장한 후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시신을 꺼내 불태운 혐의다. 동료 조직원을 죽인 후 비밀 유지를 위해 공범들과 함께 사체의 일부를 나눠 먹은 조직폭력배도 죽은 피해자는 한 명이지만 사형이 선고됐다.
이렇듯 사형수들의 혐의를 보면 모두 다 사형이 마땅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여전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재심을 청구하고 있다. 또 종교에 귀의해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있는 사형수도 많다. ‘악마일 때 잡아서 천사일 때 사형을 집행한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물론 앞으로 사형 집행이 이뤄진다 해도 이들 60명이 모두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을 기다리던 중 감형을 받아 목숨을 건진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건국 이후 총 42명의 사형수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특히 김대중 정부에서만 무려 13명이 혜택을 받았다.
1975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20시간 만에 무더기 사형 집행이 이뤄진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처럼 과거 독재정권 시절 많았던 이른바 사상범 사형수는 현재 한 명도 없다. 노태우 정부 시절인 1988년 1명이 국가보안법으로 사형 선고를 받은 이후 지금까지 국보법 관련 사형수들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리나라에서 사형집행이 마지막으로 있었던 1997년 12월30일 교수대에 오른 23명의 사형수 중에는 여성 사형수도 4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 여성 사형수는 한 명도 없다. 원래 2명의 여성 사형수가 있었지만 김대중 정부 때 모두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최근 들어 사형 집행이 계속 미뤄지고 사형수에 대한 감형이 늘어나는 것과 함께 법원의 사형 선고 자체도 급격히 줄고 있다. 1심 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된 경우가 1994년에는 무려 35명이나 됐다. 그러나 1996년 23명, 2000년 20명으로 점차 줄더니 2002년에는 7명, 2003년 5명으로 최근 들어서는 사형선고자 수가 한 자리로 급감했다. 물론 이들 중 상급심에서 사형을 면한 경우도 있다.
우리 사회가 사형이라는 제도 자체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따라 최근 국회에서 본격 논의가 시작된 사형제폐지 법안의 논의 결과가 주목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국민 대다수는 사형제의 유지를 원하는 것으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형제가 없어지면 흉악범들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실제 15대와 16대 국회 때도 각각 91명과 1백55명의 국회의원이 동의해 사형제 폐지 법안이 국회에 제출됐지만 결국 논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폐기되고 말았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이번 국회에서 비록 재적 과반수가 넘는 의원들(1백75명)이 동의해 사형제 폐지 법안을 상정했지만 통과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많다. 특히 이번에 사형이 확정된 유영철의 극악한 범행이 사형제 폐지를 막는 장애물이 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