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 좋은 남성을 물색해 소개팅을 함께하자며 유인한 뒤 납치한 일당이 검거됐다. 오른쪽 사진은 최 씨 일당이 강 씨에게 동물마취제를 술에 타서 먹인 뒤 납치하는 모습이 잡힌 CCTV 화면.
한창 소개팅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무렵 주선자 최 아무개 씨(36)는 돌연 여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자리를 정리해버렸다. 강 씨는 기분이 상해 자리를 뜨려했지만 다른 여자들이 온다는 최 씨의 말에 마음을 바꿨다. 테이블이 정리되는 시간을 이용해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강 씨는 다시금 분위기를 잡기 위해 최 씨가 건네준 술을 쭉 들이켰다.
여기까지가 강 씨가 기억하는 그날의 마지막 기억이다. 사실 강 씨가 마지막에 마신 술잔에는 동물마취제 ‘졸레틸’ 두 방울이 섞여 있었다. 이 약품은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마약류로 지정한 향정신성의약품이나 아직 법제화가 되지 않아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약품이었다.
최 씨는 과거에도 동물마취제를 이용해 범죄를 벌인 적이 있는 인물로 강 씨에게도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이었다. 사업자금이 부족했던 최 씨는 지난 5월 초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말로 인터넷 채팅사이트에서 만난 조 아무개 씨(38)를 꼬드겨 범행을 계획했다. 최 씨의 계획에는 납치까지 포함돼 있었지만 1000만 원 상당의 빚이 있던 조 씨는 쉽게 범행을 수락했다.
그들의 계획은 한 편의 범죄영화와 같았다. 우선 인터넷 채팅사이트에서 돈이 많아 보이는 사람을 찾아 소개팅을 빌미로 불러낸다. 적당한 시점에 동물마취제를 먹여 납치를 한 뒤 협박을 통해 목돈을 뜯어내면 끝이었다. 완벽한 범죄를 위해 두 사람은 대포폰을 사용했으며 범행에 필요한 장소도 미리 섭외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모든 준비가 끝난 지난 5월 31일 최 씨는 인터넷 채팅사이트에 접속해 범행대상 물색에 나섰다. 최 씨는 “스펙이 좋은 남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여성들이 있다”며 남자들을 모집했고 이에 강 씨가 쉽게 미끼를 물었다. 강 씨는 “해외에서 유학도 하고 강남에 살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는데 범행대상으로는 안성맞춤인 조건이었다.
그날 자정을 앞두고 서울 강남 신논현역에서 만난 두 사람은 근처 술집에서 여성 2명과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하지만 소개팅에 나온 여성들은 최 씨가 1인당 10만 원을 주고 고용한 아르바이트생일 뿐이었다. 해당 여성들은 “잠시 술을 마셔주면 돈을 주겠다”는 최 씨의 말에 넘어가 자신들도 모르게 강 씨 납치의 ‘도우미’가 된 것이다. 어쨌든 서로의 역할에 충실하며 술잔은 여러 차례 오갔고 점차 취기가 올랐다. 그러자 최 씨는 서둘러 여성들을 보냈고 실망하는 강 씨에겐 “다른 여자들을 부를 테니 기다리라”며 달랬다.
범인들이 범행에 사용한 도구들.
여자들이 떠나고 단 둘만 남게 되자 최 씨는 본격적인 범행을 시작했다. 잠시 강 씨가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술잔에 동물마취제를 섞어버린 것. 이를 알 리 없는 강 씨는 자리로 되돌아와 술잔을 비웠고 이내 정신을 잃고 말았다. 두 사람이 만난 지 불과 2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최 씨는 정신을 잃은 강 씨를 들쳐 업고 범행을 공모했던 조 씨와 함께 미리 임대해 놓은 서울 창동의 한 사무실로 향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강 씨는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의자에 온몸이 묶인 채 손목도 수갑으로 채워져 있어 꼼짝 할 수가 없었다. 얼굴도 테이프로 칭칭 감겨 앞도 못보고 소리조차 마음대로 낼 수 없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일을 당한 것인지도 모른 채 혼란스러워할 무렵 강 씨의 귀에 음성이 변조된 기계음이 들려왔다.
“카드 비밀번호가 뭐야?”
최 씨 일당은 자신들의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막으려 노트북으로 음성을 변조해 강 씨를 협박했다. 그제야 강 씨는 자신이 납치된 사실을 깨달았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목에 칼을 들이대고 협박을 하는 탓에 모든 질문에 답을 해줬다. 하지만 강 씨의 지갑에는 단돈 16만 원이 전부였다. 카드 현금서비스 한도도 90만 원에 불과했고 변변한 직업도 없어 강 씨로부터 뜯어낼 돈은 전혀 없었다.
이에 실망한 최 씨 일당은 목표물을 바꿔 강 씨의 아버지에게 몸값 5000만 원을 요구하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말을 안 들으면 물에 빠뜨려 죽일 수도 있다”며 강 씨를 협박해 가족 관계부터 집 현관 비밀번호까지 원하는 정보를 모두 알아냈다.
다시 어둠이 내릴 때까지 기다리던 최 씨 일당은 범행 이튿날 새벽 강 씨의 손발을 묶어 다시 차량 트렁크에 실은 채 도곡동 인근의 공중전화로 이동했다. 그런데 양재역사거리 인근에서 신호에 대기 중이던 차량 트렁크가 갑자기 열렸다. 강 씨가 트렁크 안에서 피부가 벗겨질 정도로 몸부림을 치며 일부 결박을 풀어내 ‘비상탈출장치’를 이용해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최 씨 일당은 모든 상황을 지켜봤지만 주변에 차량들이 많아 그대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
곧장 택시를 타고 도망가던 강 씨는 지나가던 순찰차량을 발견해 두 사람을 신고했고 며칠 뒤 경남 합천 등지로 도피생활을 하던 최 씨 일당을 붙잡았다. 경찰 조사를 진행하면서 드러난 최 씨 일당의 범죄행각은 예상보다 훨씬 더 치밀했다. 범행 장소로 사용했던 사무실에서는 손끝에 반창고를 붙여 지문 하나 남기지 않았으며 밖에서 내부를 보지 못하게 완전히 빛을 차단시켜 놓았던 것. 또한 이웃들에겐 영상촬영을 한다고 속여 방음장치도 설치했으며 현관키까지 바꿔 철통보안을 유지했다. 더욱이 최 씨 일당은 단기 임대가 아닌 내년 8월까지 해당 사무실을 계약해 연쇄 납치극을 벌일 계획도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에 경찰은 알려지지 않은 범행이 더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최 씨 등을 추궁하고 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
채팅사이트 12시간 탐방기 ‘걸 헌팅’ 남성들 범죄 불감증 소개팅이나 조건만남을 미끼로 사람을 불러내 납치, 강간, 살인 등으로 이어지는 사건은 잊을 만하면 발생하는 아주 드문 범죄는 아니다. 다만 최근 발생한 ‘소개팅 납치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남성이라는 점과 동물마취제까지 사용돼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또 한 가지 충격이었던 내용은 인터넷 채팅사이트를 통해 알게 된 낯선 사람과 불과 수 시간 만에 만남을 약속하는 행위였다. 자칫 범죄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채팅사이트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여성이 채팅사이트에 접속하면 남성들의 만남 요구 쪽지가 쏟아진다. 채팅사이트를 통해 만남을 원하는 사람들을 찾는 일은 정말 간단했다. 지난 1일 초저녁 무렵 기자가 사이트 가입을 하자마자 쪽지가 쏟아졌다. 대략 10분 단위로 ‘라떼 한 잔 하시겠어요’ ‘만남 원해요’ ‘낮에도 만날 수 있어요’ ‘어디사세요’ 등의 말과 함께 대화를 요청하는 남자들이 줄이었다. 그중 30대 중반이라는 직장인 A 씨는 “오늘 밤에 당장 만날 수 있다. 원하는 장소만 말하면 가겠다”며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기자가 ‘혼자 살고 있느냐’ ‘차는 가져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휴대전화는 꺼놓을 수 있냐’ ‘잠시 일행과 만났다가 따로 나가야 할 것 같다’ 등 까다롭게 대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나중엔 대놓고 “요즘 남자들도 채팅에서 만난 사람들한테 납치당했던데 걱정이 안 되느냐”고 물었는데 예상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A 씨는 “그런 일에 당한 남자가 바보다. 나는 눈치도 빠르고 절대 납치 같은 거 당할 일 없다”라고 자신했다. 또 다른 30대 남성 역시 납치 사건을 언급하자 “몇 년 동안 채팅사이트 통해서 여자를 만났는데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재수 없는 놈들은 뭘 해도 걸리는 법”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성별을 바꿔 남자로 가입한 뒤 또 다시 채팅사이트에 접속해봤다. 쏟아지는 쪽지 세례는 없었지만 채팅방을 골라 쉽게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조건만남을 원하는 여성들은 ‘싸게 만나요’ ‘밤새도록 함께 보내요’ ‘XX동 대기 중’ 등 노골적인 채팅방 제목으로 남성들을 유혹하고 있었는데 접속만 하면 시간, 장소, 가격을 협의하고 바로 만나는 시스템이었다. 상대방이 작정하고 여성으로 속일 수도 있는데 누구도 검증을 하려는 이가 없었다. 여성을 기다리는 채팅방에 들어가 “짝이 부족한데 소개팅에 나올 수 있느냐”도 물었다. 3명의 남성이 흔쾌히 수락을 했는데 거절한 한 명도 지역이 너무 멀어 못 간다며 연신 아쉬움을 표했다. 이번에도 소개팅을 수락한 남성들에게 납치 사건을 언급했으나 신경 쓰지 않는다는 분위기였다. 이처럼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과 인터넷에 만나 만남을 약속하는 데 불과 몇 분이 걸리지 않았다. 더 이상 남자들도 소개팅이나 조건만남에서 안전하지 못한 세상이지만 여전히 인터넷 채팅사이트는 밤낮 없이 활발히 움직이며 범죄자들의 ‘먹잇감’ 물색 장소가 되고 있었다. [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