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 한국기원 부총재
바둑진흥법은 바둑계 발전의 결정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비유하자면 소년체전보다는 바둑진흥법이 상위법이다. 바둑진흥법이란 게 생기면 소년체전 입성은 자동이다. 이것에도 당연히 바둑계에서는 만인이 공감하고 지지하며 염원하고 있다. 그러나 가능성에서는 문제가 있다.
지난해 이인제 의원과 함께 바둑진흥법 발의에 중심 역할을 했던 김기선 의원의 말에 따르면 “만만치 않다”는 것. 그렇겠다는 생각이 든다. 바둑은 대한체육회 55번째 정회원이다. 국회에서 바둑 진흥을 위한 특별법 같은 걸 만든다면 나머지 54개 종목이 가만있을 리가 없다. 왜 바둑만 특혜를 주느냐고 따질 게 뻔하다. 국회의원 전부 바둑 팬인 것도 아니다. 바둑은 역사가 무려 5000년이고, 우리가 세계 1등이고, 그런 건 바둑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얘기다. 체육 종목 중에서 우리가 세계 1등인 것이 어디 바둑뿐인가. 더구나 요즘은 중국에 밀리고 있다. 김기선 의원이 “만만치 않다”고 말한 것도 바로 그래서였을 것이다.
바둑토토. 얘기가 처음 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사정은 똑같다. 찬반이 분분하다. 찬성이 숫자는 많을지는 모르지만 소극적이고, 반대는 목소리가 뚜렷하다. 토토를 지지하는 쪽은 “돈이 된다” “바둑계의 돌파구가 거기에 있다” “나쁜 점도 있겠으나 일단 해 보면서 고쳐가자”고 하는데, 강력하게 주장하지는 못하는 느낌이다. “바둑을 노름의 나락으로 밀어 넣는 일이다” “바둑의 본질과는 너무 다르다” “어린 프로기사들을 망가뜨릴 소지가 농후하다”는 반대쪽의 논거에 일단 명분에서는 밀리기 때문이다.
제3회 일요신문배 어린이바둑대회 대국 장면.
몇 년 전에 솟아나왔다가, 한동안은 수면 아래 있는 것 같다가, 다시 화제가 되는 바둑토토를 보면 최근 최초의 바둑 영화라는 간판을 걸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개봉했던 <스톤>과 <신의 한 수>가 오버랩된다. 두 영화는 이야기의 골격이 같다. 프로기사 또는 연구생 청년이 초야에 숨은 고수, 잔인하고 비열한 악당, 가벼운 입담꾼 등과 얽히고설키며 내기바둑과 복수를 폭력으로 변주한다. 내기바둑이 복수와 폭력의 원인이 되는 것이니 그런 의미에서는 바둑 영화다. 그러나 현실성이 없다. 영화가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그렇더라도 폭력이 지나치다. 그 정도 내기바둑에 그렇게 잔인한 폭력이 동원되는 경우는 없다. 게다가 툭하면 수십 명이 죽고 죽이다니. 이야기의 구조에서도 필연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두 영화에서는 또 똑같이 무전기로 훈수하는 내기바둑 장면이 나오는데, 어설프다. 옛날에 대전에서 한 번 그런 일은 있었다. 대공분실에서 이상한 전파를 잡고 추적하니 여관이었다. 노인들이 바둑을 두고 있었고 허리춤에서 ‘모스 부호(Morse code)’ 수신기가 발견되었다. 노인의 허리는 수없이 따끔거리는 신호를 받느라 시커멓게 멍들어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런 게 통하는 시대가 아니다.
1979년에 미국에서 나온 <시부미>(Shibumi)라는 장편소설이 말하자면 바둑 소설이었다. 2차대전이 끝날 무렵 상하이에서 아버지가 독일 사람이고 어머니가 러시아 사람인 소년(니콜라이 헬)이 고아가 되고, 퇴각하는 일본군 장수가 소년을 일본으로 데려가 바둑 고수에게 맡긴다. 소년은 바둑 수련과 명상을 통해 심신의 고양을 체험하면서 절정의 무예도 습득한다. 소년은 성장해 국제 스파이가 되어 전 세계를 누비며 활약한다. 소설은 밀리언셀러를 기록했고, 1980년 여름 조훈현 9단이 미국에 건너가 바둑 외교를 펼칠 때 그를 특집기사로 다룬 <워싱턴포스트> 기자는 기사 중간 중간에 시부미의 한 대목씩을 인용했다.
영화 <스톤>(왼쪽)과 <신의 한 수>의 장면들. 두 영화는 내기바둑을 모티브로 해 최근 재추진 중인 바둑토토의 부정적 측면과 오버랩된다.
시부미는 일본말인데, 사전에도 잘 나와 있지 않은 묘한 단어다. ‘어떤 미묘한 아름다움’, 대충 그런 뜻이라고 한다. 작가 트리베니언(Trevanian)은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동양 혹은 일본의 바둑 문화를 어떻게 알았으며 시부미라는 말은 또 어떻게 찾아냈는지. 소설은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국내에서도 ‘니콜라이 헬’이라는 제목으로 변역본이 나왔었다.
<스톤>과 <신의 한 수>는 바둑영화가 아니다. 바둑은 그저 소품일 뿐 사실은 폭력 영화다. 소재가 바둑 아닌 다른 어떤 것이었더라도 이야기 전개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난 느낌은 조금은 황당하고 많이 씁쓸해, 한 달쯤 전에 <스톤>의 감상평은 조세래 감독을 추모하는 것으로 대신했었다. 바둑을 잘 두고, 바둑 영화를 필생의 업으로 삼아 추진하다가 기어이 영화를 찍고 편집까지 마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난 사연이 가슴 아팠으며 개인적으로도 인연이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그랬던 것인데, <신의 한 수>는 그런 것도 없다.
바둑토토,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도 지나치지 않다. 결국은 돈인데, 많이 생겨도 문제, 많이 안 생겨도 문제다. 많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할 필요가 없고, 그렇지 않다면 검은손의 유혹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대처할 방도는 있는가, 그걸 제시해야 한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