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의 꿈 이뤄질까 이건희 삼성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이 회장은 2003년 직접 스웨덴 발렌베리를 방문, 지배구조와 사회공헌에 대해 관심을 드러냈다. 연합뉴스
지난 5월 11일 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쓰러진 후 주식시장엔 위기감이 감돌았다. 보통 오너나 최고경영자(CEO)에 좋지 않은 일이 닥쳤을 때 해당 기업 주가는 떨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회장에게 일이 닥친 것은 일요일 밤과 월요일 새벽이었다. 당장 월요일 개장부터 삼성그룹 주가의 움직임이 관건이었다.
세간의 우려와 달리 삼성전자가 3.97% 급증하는 등 삼성그룹 주가는 오히려 상승했다. 이후에도 며칠간 꾸준한 상승세를 보였다. 스티브 잡스가 사망하자 애플 주식이 요동친 것과 대조적인 모습이다. 증권업계 관계자들은 삼성그룹 계열사들의 주가 상승 원인으로 ‘삼성의 지배구조에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기대감’을 꼽았다. 풀이하자면, 지금까지는 이건희 회장 일가가 지배적 오너십을 발휘해 주주들의 이익에 큰 보탬이 되지 않았다면 앞으로는 이 같은 지배구조에 변화가 생겨 주주들의 이익이 증대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한몫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투자자들의 예상대로 이건희 회장의 와병을 계기로 삼성 지배구조에 변화가 생길까. 삼성 측은 이미 오래전에 “지배구조를 심플하게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즉 금융과 산업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순환출자구조를 간단히 정리하겠다는 것. 삼성 관계자는 “2011년 삼성에버랜드의 삼성카드 지분을 KCC에 매각한 것 등도 이에 해당한다”며 “최근 잇달아 단행한 사업구조개편과 지분 정리도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삼성그룹은 현재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SDI→삼성물산→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를 갖고 있다. 순환출자금지·금산분리(금융 기업과 일반 기업 분리) 등 우리나라 분위기에 맞춰 삼성도 결국에는 순환출자구조를 해결할 것으로 내다보는 사람이 다수다. 삼성의 지주회사 체제 변화 움직임에 대한 예측이 심심찮게 제기되기도 한다.
재계 고위 인사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기 때문에 당장은 힘들겠지만 삼성이 궁극적으로는 지주회사 체제를 모색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삼성이 순환출자구조를 해소하고 지주회사 체제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많게는 20조 원가량 소요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 관계자는 그러나 “지배구조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확정된 것도 없으며 공식적으로 발표한 바도 없다”고 잘라 말했다.
마르쿠스 발렌베리 SEB 회장에 따르면 발렌베리 재단은 연간 약 2조 7000억 원을 사회에 기부한다. 연합뉴스
스웨덴 최대 기업집단인 발렌베리는 1856년 창업주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 이후 지금까지 무려 158년 동안 5대째 발렌베리 가문이 경영권을 이어오고 있는 대표적인 가족·세습기업이다. 이것이 이건희 회장이 발렌베리를 삼성의 롤모델로 삼은 이유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속담에 ‘부자 3대 못 간다’는 말이 있듯 한 기업을 수대에 걸쳐 오랫동안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발렌베리처럼 계속 창업 가문이 이어오고 세계 일류기업으로 남아 있기는 더욱 힘들다.
발렌베리와 삼성은 닮은 점이 꽤 있다. 발렌베리는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고 있으며 발렌베리 계열사의 시가총액은 스웨덴 주식시장 전체 시가총액의 40%에 달한다. 스웨덴 인구의 4.5%가 발렌베리그룹에서 일하고 있다. 스웨덴 경제발전과 고용 창출 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
발렌베리는 1856년 은행업으로 시작해 현재 SEB(SE방켄·발렌베리의 모태인 스톡홀름엔스킬다은행과 스칸디나비스카은행 합병으로 탄생), 에릭슨(통신장비), 일렉트로룩스(전자) 등 스웨덴 대표기업 약 20개를 거느리고 있는 거대 기업집단이다. 발렌베리를 빼놓고 스웨덴 경제를 얘기할 수 없다.
삼성도 비슷하다. 지난해 기준 삼성 계열사 상장기업의 시가총액은 우리나라 주식시장 전체 시가총액의 27.5%를 차지하고 있다. 내년 상장이 예고돼 있는 삼성SDS와 삼성에버랜드를 합하면 주식시장 전체 시가총액에서 삼성그룹 주식이 차지하는 비중은 30%에 육박한다. 발렌베리와 스웨덴의 관계가 그렇듯 우리나라에서도 삼성을 빼놓고 경제를 얘기하기 힘들다.
이건희 회장이 발렌베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2003년 이 회장이 직접 스웨덴 발렌베리를 방문, 지배구조와 사회공헌에 대해 관심을 드러냈다. 이후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발렌베리에 대해 연구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연구원을 스웨덴에 파견해 그들의 지배구조와 문화를 연구하도록 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의 다른 관계자는 “롱런할 수 있는 비결과 분위기, 특장점을 연구·검토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그룹 내부적으로도 (발렌베리의 구조와 문화를) 고려해야 한다는 얘기가 많았다”고 귀띔했다.
2010년 11월 11일 열린 서울 G20 비즈니스서밋 폐막 총회에서 정상들에게 전달될 공동 성명에 대한 의견을 참석자들에게 묻고 있는 마르쿠스 발렌베리 SEB 회장. 연합뉴스
이후에도 삼성과 발렌베리는 꾸준히 교류해왔다. 2012년에는 발렌베리 가문의 주요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해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 오너 일가와 함께 만찬 등 시간을 갖기도 했다.
하지만 발렌베리와 삼성의 차이점도 상당하다. 가장 큰 차이점은 지배구조다. 발렌베리는 비록 5대째 창업가문이 경영권을 이어오고 있지만 창업가문이 직접 그룹과 계열사들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삼성처럼 순환출자구조도 아니다. 2000년대 초부터 발렌베리에 대해 연구·검토했지만 아직까지 발렌베리의 구조와 시스템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확연히 다른 지배구조 때문이다.
발렌베리는 지주회사 인베스토르(Investor)를 통해 계열사들을 거느리고 있다. 인베스토르는 발렌베리 가문의 3개 재단이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발렌베리 일가는 지주회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그룹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재단을 통해 간접 지배한다. 경영에도 참여하고 있어 마냥 멀찍이 떨어져 있지도 않다.
다만 발렌베리 일가 중 경영에 참여하는 인물은 일정한 자격 요건을 갖춘 소수에 불과하다. 기업경영과 사회적 책임에 사명감을 갖고 있어야 하며 군복무는 꼭 해야 한다. 우리나라처럼 2세, 3세들이 대부분 회사 경영에 참여하고 기업을 물려받으며 군대도 면제되는 분위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무엇보다 비영리공익재단이 그룹의 지주회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발렌베리 일가의 재산은 그리 많지 않다. 발렌베리 일가는 재단 근무자로서, 기업 경영자로서 급여만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 1000대 부호 명단에 발렌베리 일가의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이유다. 지난 3월 미 경제지 <포브스>가 발표한 ‘2014 세계 부호 순위’에 이건희 회장이 111억 달러(약 11조 1000억 원)로 102위, 이재용 부회장이 45억 달러(약 4조 5000억 원)로 328위에 오른 것과 대조된다.
‘기업의 사회적 책무’ 부분에서는 발렌베리와 삼성이 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발렌베리도 물론 이익금 중 일부가 배당을 통해 인베스토르로 들어가고 이것이 다시 재단에 들어가긴 한다. 하지만 비영리공익재단으로서 대부분의 자금이 장학금이나 연구개발비 등 공익적 목적과 사회공헌활동에 쓰인다. 발렌베리그룹 자체적으로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사회에 환원한다.
현재 5대째인 마르쿠스 발렌베리 회장에 따르면 발렌베리 재단은 연간 1억 6000만 파운드(약 2조 7000억 원)를 기부한다. 엄청난 세금으로 유명한 스웨덴에서 이를 피하기 위해 일부 기업이 조세피난처로 피한 것과 비교하면 발렌베리의 사회적 책무 이행은 스웨덴 국민들에게 존경받아 마땅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것이 스웨덴 최대 기업이 스웨덴 최고의 국민기업으로 칭송받는 원동력이다.
발렌베리 가문은 스웨덴 대표 은행 SEB 등 20여 개 기업의 경영권을 직·간접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삼성은 이 부분에서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 최대 기업으로서 삼성의 사회공헌활동이나 기부, 장학사업이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 등 여러 전문가들의 지적했듯이 무노조 원칙 고수, 삼성전자서비스 같은 ‘노동의 외주화’,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장 백혈병 피해자들과의 관계 등으로 최대 기업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 왔다.
이대원 전 제일모직·삼성중공업 대표가 쓴 <삼성 기업문화 탐구>라는 책에는 삼성이 이미 오래전부터 1965년에 설립된 삼성문화재단을 지주회사로 해 피라미드식 지배 형태를 고려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지금의 발렌베리의 지배구조와 다를 바 없다. 비록 이는 이 전 대표가 작성한 내부 건의서에 불과했지만 최소한 그룹 수뇌부에서 참고는 했다는 얘기다.
이건희 회장과 삼성이 진정 발렌베리 같은 기업을 꿈꾼다면 지배구조 변화뿐 아니라 사회적 책무도 그만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지배구조와 관련해 발렌베리를 연구·검토한 적 있다는 한 대기업 관계자는 “지배구조도 투명하지만 사회공헌활동이 놀라웠다”면서 “흔히 삼성과 비교되는데 그 정도 사회공헌이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회장 와병 이후 백혈병 피해자 보상과 관련해 원만히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보인 것은 그런 와중에 진일보한 일로 평가받고 있다.
발렌베리가 158년 동안 계속 지금 같은 명성과 존경을 받아온 것은 아니다. 집권 사회민주당과 정경유착을 하기도 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 나치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강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형제간 경영권 다툼이 일어난 적도 있으며 그룹 후계자가 자살해 한동안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은 적도 있다.
발렌베리에 대한 인식을 바꾼 것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익사업과 사회공헌활동이다. 오너 일가는 그룹의 경영권만 잇고 있을 뿐 개인적인 부를 축적하거나 기업을 사유화하지도 않는다.
발렌베리의 지배구조와 문화, 사회적 책무를 보기 좋게 간단히 삼성에 대입해보면 삼성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정해진다. 먼저 지주회사체계를 갖춰야 한다. 그리고 호암재단, 삼성재단, 삼성장학회 등 삼성 오너 일가가 세운 재단들이 지주회사를 지배하는 구조여야 한다. 삼성 오너 일가는 본인 소유 주식을 전부 재단에 기부해야 하며 재단 근무자로서 또 그룹과 계열사 경영자로서 급여만 받아야 한다. 재단으로 들어오는 기업들의 배당금과 이익금은 모두 공익사업에 써야 한다. 과연 미래의 삼성이 이 같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