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혜경의 방을 지켜보는 차가운 시선이…
같은 해 3월 한 여대생의 피살체가 산중에서 발견되면서 시작된 이 사건은 해외 도피를 했던 살인용의자들이 1년여 만에 경찰에 검거돼 대기업 회장부인의 청부살인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일단락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세 차례의 재판을 거치면서 치열한 진실공방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사건의 뒤안길에 가려져 있던 충격적인 사실들이 하나둘씩 드러났습니다.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은 얼마나 될까요? 사건에는 아직도 수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편집자주-
세 번의 살인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다시 여대생 정혜경이 죽음의 대상이 됐다. 회장부인은 이제 단순한 살인 지시로 끝나지 않았다. 직접 정보를 파악하고 킬러들을 더욱 압박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칠성파를 고용해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했다.
킬러 마기룡은 이번에는 총을 사용하기로 했다. 접근이 불가능하면 차 안에 있다가 뒤통수에 납탄을 박아넣는 것이다. 엽총과 공기총은 얼마든지 구입할 수 있었다. 엽총은 소리도 나고 파출소에 보관해야 하지만 공기총은 자유로웠다. 신형 공기총은 위력이 대단했다. 판자 세 겹을 관통할 정도의 힘이었다. 특히 납탄을 두 개 겹쳐서 쏘면 즉사할 위력이었다. 마기룡은 망원조준경이 달린 공기총과 리볼버, 탄창, 그리고 실탄을 샀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이제 미행·감시도 더 집요해졌다.
2002년 2월 말 어느 날 오후 8시경. 어둠이 내린 정의택씨 아파트 정문 앞 도로에 몇 시간째 그랜저 한 대가 서 있었다. 차 안에는 김용국과 마기룡이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그때 김용국의 휴대폰의 진동음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어디냐?”
회장부인이 위치를 확인하는 냉랭한 목소리였다. 자꾸 의심하고 있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감시하고 있습니다.”
김용국이 긴장한 표정으로 힐끗 차 주변에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알았다.”
회장부인은 어둠 저쪽에서 그들을 보면서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다시 휴대폰이 떨렸다. 회장부인이었다.
“마기룡이를 잠깐 다른 데로 보내라.”
회장부인은 미행을 시킬 때에는 항상 신분을 노출했다. 그러나 살인을 청부한 이후는 철저히 몸을 사렸다. 나중에 물고 늘어질 걸 철저히 막기 위한 대비책이었다.
“지금 고모님이 근처에 온 모양인데 잠시 자리를 비켜줘.”
김용국이 운전대에 앉은 마기룡에게 말했다. 회장부인의 신분을 감추다가도 이따금씩 말이 잘못 튀어 나갔다. 킬러지만 마기룡도 친구였기 때문이다.
마기룡이 차에서 내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회장부인이 소리 없이 차 뒷문을 열고 들어와 앉았다. 화가 잔뜩 난 표정이었다.
“왜 아직도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냐?”
회장부인이 김용국을 쥐어짰다. 부리는 사람을 그냥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일부러 일을 안 하는 게 아니잖아요.”
김용국도 짜증스런 어조로 되받았다.
“처음에 큰돈 가져갈 땐 여러 명을 동원하기 때문에 그렇다더니 왜 너희들 외에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
회장부인이 따지는 말에 김용국은 할 말이 없었다. 마기룡이 처음에 그랬었다. 그는 문득 차 뒷좌석에 있던 총이 떠올랐다.
“총도 있어요. 좌석 옆을 보세요.”
김용국은 조준경이 달린 총을 회장부인에게 가리켰다.
“아니야, 네놈들이 그동안 나를 가지고 장난을 친 거야. 여러 사람 동원한다더니 항상 보면 한 명 아니면 두 명뿐이야. 이제 너희들 안 시키겠어. 너 다른 소리 말고 마기룡한테서 돈 다 도로 찾아와.”
회장부인은 그들이 돈만 받고 사기 치는 걸로 의심하고 있었다.
“알았어요.”
김용국은 돈만 있으면 확 던져주고 돌아가고 싶었다. 회장집은 수백만원씩 관리비를 내는 강남의 빌라에 살면서도 지하 단칸방에서 사는 그들에게 항상 돈 없다고 죽는 소리를 하곤 했다. 더러 그 집 가정부 일을 한 아내는 야박한 회장집 근처에는 가지도 말라고 했었다. 회장부인이 슬쩍 덧붙였다.
“여기 경비원한테 들었는데 정혜경이가 새벽에 수영장을 간다고 하더라.”
마지막 기회를 주는 정보였다. 새벽시간은 완전범죄를 할 수 있는 기막힌 기회였다. 그날 밤 자정부터 그들은 계속 대기했다. 다음날 새벽 5시20분. 아파트는 아직 짙은 어둠에 젖어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아파트 3층 정혜경의 방에 불이 들어왔다. 김용국과 마기룡은 바짝 긴장했다.
잠시 후 정혜경이 아파트 입구로 나와 어디론가 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차에서 내려 소리 없이 미행했다. 회장부인의 정보대로 정혜경은 부근의 헬스클럽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이후 그들은 며칠간 정혜경의 움직임을 정밀하게 체크했다. 수영장에 가서 알아보니까 회원권을 끊었는데 새벽시간 수영반이었다.
그들은 정혜경이 한방병원을 규칙적으로 다닌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아파트 정문 앞이나 병원 근처에서 그레이스 승합차로 납치해 살해하기로 했다. 새벽시간에 혼자 아파트에서 나오는 기회가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파트 앞은 대로변이고 24시 편의점이 있었다. 목격될 위험이 다분했다. 편의점 직원이 한눈을 파는 1~2초 사이에 정혜경을 납치해야 했다. 그들 두 명이 그렇게 하기는 무리였다.
마기룡은 후배건달을 동원하기로 했다. 일당을 주고 길거리에 숨었다가 정혜경을 잡아 차에 싣는 일까지만 시키는 것이다. 정혜경이 새벽시간에 규칙적으로 혼자 나서자 일이 급속도로 진전됐다. 김용국과 마기룡은 철물점에 가서 납치에 필요한 물건들을 샀다. 시체를 덮을 포대자루, 청테이프, 노란색 질긴 테이프, 나일론 줄 등이었다.
마기룡은 살해 후 매장할 장소들도 물색했다. 청담동 정혜경의 아파트에서 나와 잠실부근에서 88도로를 타고 빠지면 10여분 내에 팔당대교 주변이었다. 그 부근은 산이 깊고 한적한 곳이 많았다. 미사리 도로 끝부분에 공사장이 있었다. 공사 차량이 드나들었지만 다른 차량의 진입을 막는 바리케이드는 쳐 있지 않았다. 새벽이면 공사장에 사람이 없었다. 그 한쪽에 작은 계곡을 끼고 비스듬히 산으로 올라갈 수 있는 오솔길이 있었다. 차의 왕래도 없고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장소였다.
이제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가고 있었다. 마기룡은 틈틈이 야산에 올라가 사격연습을 했다. 나무에 과녁을 만들어 쏘고 까치를 조준해 떨어뜨리기도 했다. 총알에 두꺼운 나무껍질들이 튕겨 나갔다.
그 무렵 정의택씨는 까닭 없이 불안했다. ‘접근금지 가처분결정’을 받아 이제는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뭔가 마음속은 계속 동요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신경과민 같았다. ‘법원에서 승소하기까지 회장부인에게 가족이 모두 너무 고생했기 때문일 거야.’ 그러나 그의 불안이 아주 근거가 없는 건 아니었다.
얼마 전 딸 혜경에게 정체불명의 여자로부터 전화가 왔었다. 공포에 질린 혜경이 그 사실을 알렸다. 그는 딸의 피해의식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민·형사에서 다 이긴 셈인데 회장부인이 더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더구나 사회적 지위가 있는 회장부인이 막가는 행동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혜경이는 뭐가 씌웠는지 경찰서에 가서 그 괴전화를 조사해 달라고 하면서 신변보호 요청까지 했다. 식구들 모두 신경과민 같았다.
정의택씨도 자꾸만 주변에서 수상한 것만 보였다. 한번은 퇴근 무렵 우연히 아파트 앞 도로에 서 있는 그레이스가 신경을 자극했다. 온통 검게 한 썬팅에서 물씬 범죄냄새가 났다. 그 앞은 다단계판매 사무실이었다. 정의택은 그 사무실의 차로 생각하자고 마음을 돌렸다.
사실 경호업체를 알아봤었다. 일주일에 3백만원을 달라고 했다. 한 달이면 1천만원 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경찰은 사고가 터져야 개입하고 개인은 돈 없으면 안전이 보장되지 않았다.
혜경이는 다시 공부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혜경이는 새벽시간에 가는 수영장 회원권을 끊었다. 웅크리던 생활에서 벗어나 이제 정상으로 돌아가야 하겠다는 것이다. 정의택씨는 그래도 마음에 걸렸다. 어느 날 저녁 그는 딸 혜경이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새벽이 밤중보다도 더 위험할 수 있으니까 웬만하면 다니지 말거라.”
옆에서 듣던 엄마도 끼어들었다. 걱정하는 감정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래, 혜경아. 아침 8시로 시간을 바꿔서 엄마도 같이 수영장에 가자.”
“엄마 아빠, 그렇게 하면 오전 공부시간을 그대로 낭비하게 돼요.”
혜경의 대답이었다. 순간도 아끼는 악착스런 딸이었다. 그런 성격 때문에 남자친구가 지어준 휴대폰의 ID는 ‘하동댁’이었다. 그런데 그 무렵 혜경은 ID를 갑자기 ‘초생달’로 바꾸었다. 쓸쓸하고 서글픈 이름이었다. 정의택은 오전 공부 시간을 망치지 않겠다는 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효녀인 딸은 이틀 동안 수영장에 가는 걸 참았다.
살해되기 하루 전인 3월5일 밤. 정의택씨는 집에서 신용카드를 초과해서 쓴 큰아들을 나무라고 있었다. 그때 혜경이 들어왔다. 혜경은 요새 대학생들 다 그렇다고 오빠를 두둔했다. 혜경은 식구들을 화합시키는 꽃이자 온기였다. 정의택씨의 마음이 풀렸다. 혜경은 방으로 가서 엄마의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그날 일을 얘기했다. 모녀지간은 조금의 비밀도 없었다.
혜경은 매일 밤 냉장고에서 마실 것들을 식구들에게 나누어 주는 버릇이 있었다. 혜경은 아빠 방에 요구르트를 가지고 왔다. 정의택씨는 “그래, 알았다. 놔두고 가라”고 말했다. 그게 딸과의 사실상 마지막 대화였다.
3월6일 새벽 4시. 마기룡과 김용국 그리고 동원된 건달들을 태운 그레이스 승합차가 아파트 앞 대로변에 웅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틀 동안 정혜경의 방은 새벽에 불이 켜지지 않았다. 마기룡은 초조했다. 수영장에 가서 분명 강습일자를 확인했는데도 정혜경은 새벽에 나오지 않았다. 이제 오늘도 나오지 않으면 건달들을 돌려보내고 철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순간 정혜경의 방에 불이 켜졌다.
“야, 불 켜졌다. 모두 정신 차려.”
마기룡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웅크리고 졸던 건달들이 부스스 눈을 떴다.
그 시각 정의택씨도 잠결에 “찰그락” 하고 아파트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왜 내 말을 안 듣고 녀석이 새벽에 또 나가지?’
정의택씨는 속으로 은근히 짜증이 났다. 잠시 후 다시 “찰칵” 하고 아파트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내려갔던 혜경이 다시 올라와 우산을 가지고 나가는 것 같았다.
“새벽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딸이 죽으러 가는지도 모르고 잠에서 깬 엄마가 중얼거렸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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